생원일기

불편함과 동행

재정이 할아버지 2017. 11. 8. 05:54

시내버스에서는 서서 가기가 불편하다. 서서 가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앞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의 불편 때문이다. 나이가 어중간한 나를 흘끗 바라보고는 잠든척 하거나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는다. 서서 가는 다리의 불편함보다 나를 불편해라는 학생의 태도가 정말 불편하다. 차라리 내 나이와 비슷한 사람 앞에 가서 서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

 

고향마을에 가보면 이순을 넘기고 고희를 앞둔 친구들이 아직도 청년회원이다. 노인회가 있으려면 청년회가 있어야 하는 구조상의 필요 때문이다. 나이가 들었으니 청년도 아니고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많으니 노인도 아니어서 기막히게 불편한 우리 세대이다

 

나는 칠남매의 막내다. 내가 네살때 큰 형수를 맞았다. 큰형수는 내가 중학교를 갈때 까지도 나를 "애기"라고 불렀다. 큰형수가 애기라고 나를 부르면 네살 아래 큰조카 부터 작은 조카들이 줄줄이 따라나왔다. 처음 시집올때 아기였던 시동생은 나이와 상관없이 영원히 아기로만 보인다고 한다

 

두서없고 위 아래도 없이 엉키고 설켜서 자란 나의 불편한 성장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지금도 애기할아버지라고 불려서 집안에서 조차 청년도 아니고 노인도 아닌 엉거주춤한 생활은 불편함 그 자체다

 

우리사회는 관습적으로 육십갑자가 회귀하는 환갑나이를 노인의 기준으로 삼았다.직장의 정년도 60세 전후다. 소싯적을 돌아보면 회갑잔치는 마을 전체가 들썩이는 큰 잔치이고 환갑노인은 마을에서 어른대접을 받았다. 지금은 회갑을 노인나이로 보지 않는다. 노인이기에는 너무 젊고 일손을 놓기에는 남은 일들이 많다. 그런 연유로 나의 회갑은 누가 알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비밀처럼 조용히 넘겼다

 

그래도 나이는 거짓말을 안해서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환갑을 지나고 보니 나이값인 품위유지비가 들어간다. 나이에 맞는 품위를 유지하려면 현금지급기가 되어야 한다. 어른들이 계실때에는 어른들에게 중언부언 하고 싶은 말도 하고 부족한것은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이제는 내가 어른들의 자리에 섰다. 어른이 되고 보니 손자의 재롱도 아들의 하소연도 보고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지갑에 손이 먼저 간다. 나를 위해서는 꼭 닫혀있던 지갑이 손자의 재롱과 아들의 하소연에는 비밀번호가 털린 현급지급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손자의 재롱을 더 볼 수 있고 아들의 어려움이 나누어 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앞뒤를 가를 겨를도 없다. 간당거리는 통장잔고 걱정과 마누라의 잔소리를 이겨내는 불편함은 내몫이다.

 

마네킹이 되어버린 몸도 불편하다. 내가 좋아하는 옷은 오래 입어서 정이 들고 아무때나 입어도 편한 옷이다. 잠을 잘 때도 입고, 집안을 청소할 때도 입고, 동네 외출할 때도 입는 24시간 다기능으로 편한 옷이 좋다. 나이가 들면 추해진 몸에 옷마저 낡아서는 안된다며 마누라가 새옷을 사온다. 아들도 운동복을 사온다.음에 안들어도 사온 성의 때문에 정들고 편한 옷을 버리고 불편한 새옷으로 갈아 입는다. 마누라도 아들도 깨끗하고 잘 어울린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새옷이 불편하다. 마네킹처럼 마누라가 입히는 대로 입고, 잘 때는 벗고, 외출하려면 갈아 입는 옷은 몹시 불편하다

 

이가 아파서 딱딱한 음식을 못먹는 것도 불편하다. 전화기 소리가 안들려 전화기를 옆에 두고도 마누라 전화를 못 받아서 지청구를 듣는 것도 불편하다. 관공서에 가려면 돋보기 안경을 챙기는 것도 불편하다. 모두 불편한것 뿐이다

 

환갑을 넘기면 불편한 것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불편함을 익히고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제일 먼저 익힌 불편함과 동행은 마누라와 손만 잡고 자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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