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100세까지 산다면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 8. 20:08

퇴직을 앞두고 은퇴자 교육이 있었다. 직장에 맞추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인생의 전환기 교육이니 분위기는 무겁고 심각하게 시작되었다.

 

첫날 첫 강의에서 강사는 "100세까지 산다면?"이라는 제목을 칠판에 크게 써 놓고 모두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나가 버렸다

 

직장생활을 할 만큼 했고, 나이도 들 만큼 들었고,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위치의 사람들이지만 돌발적으로 100세 까지 산다면 이라고 물으니 순간 수도승처럼 진지해졌다. 평생을 살아온 직장에서 퇴직이라는 강박감도 무거운 짐인데 고령화 사회라 하더라도 100세 까지 산다는 것은 미쳐 생각 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시간 뿐만 아니라 2박 3일 간의 일정마다 주제는 "100세 까지 산다면?"이었다. 100세 까지 사는 것이 축복인가 재수가 없는 것인가는 부제였다.

 

답은 없었다. 교육도 끝났고, 은퇴도 했고,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내가 100세 까지 산다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직도 구하지 못했다. 조용한 시간이 되면 "100세까지 산다면?"이 아직도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뿐이다. 100세 까지 살려면 건강해야 하고, 먹고 살만큼 재력이 있어야 하도 지루하지 않게 즐길 취미도 있어야 축복이라는 것만 교육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100세를 살더라도 내 몸도 스스로 추스리지 못하면 의미없는 삶이고. 생활비에 쪼들려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면 불행한 것이고 하루하루가 지루하다면 오래 사는 것이 재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창고와 인연이 깊다. 군대에서는 시설 보급병 주특기로 부대의 주식 창고를 담당했다. 직장에서는 제품 원료 구매를 담당해서 대규모 창고를 관리했다. 어느 창고나 창고 입구에는 3정5행(三定五行)이라는 표어가 붙어있었다. 3정5행은 일본에서 체계화된 경영혁신 수법이다 창고 관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3정5행의 실천이다. 三定은 정품, 정량, 정위치를 말하고 五行은 정리, 정돈, 청소, 청결, 습관화를 말한다. 공장은 물론이고 공동으로 생활하는 직장 내에서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퇴직할 때 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실천을 강요받는 구호다. 3정 5행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암묵지처럼 습관화된 실천이 중요한 직장인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100세 까지 산다면 이라는 풀리지 않는 숙제를 생각할 때 마다 3정5행으로 남은 인생을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품은 건강을 유지한다는 말이다. 정량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재고의 낭비를 버리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재물만으로 살자는 것이다. 정위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이니 쓸데없는 명예나 과시를 멀리하고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으로 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몸과, 마음과, 가정을 정리하고, 정돈하고, 청소하고, 청결하게 하는 것을 생활화한다면 100세를 살아도 후회할 것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삶의 깊이가 다른 것이 인생이다. "100세까지 산다면"이라는 거창한 명제 앞에서도 나는 내가 아는 창고관리 구호 밖에 생각이 나지 않으니 그것이 나의 한계이다. 퇴직을 임박해서야 100세 까지 행복하게 살려면 건강해야 하고, 재산도 있어야 하고. 고상한 취미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생 100세는 허투로 포기할 수 없는 하늘의 선물이다 늦었더라도 내 형편과 절충해서 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모든 이론과 철학을 글로 써놓으면 거창하게 보이지만 그 내면의 행간에는 자기변명도 숨어있다. 나의 100세까지 3정5행도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운동삼아 하는 집안 청소와 청결한 푸성귀를 먹기 위해 주말농장 농사에 힘쓰는 일이 전부다. 아내에게 지청구를 먹어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으니 그때 끄때 눈치껏 살뿐이다. 퇴직 후 겁 없이 조그만 사업을 한다고 나대다가 석달도 못 버티고 손을 들었고, 친구가 사정이 급하다고 해서 빌려준 돈을 떼이고 보니 행복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을 깨닳았기 때문이다.

송해처럼 100살이 되도록 국민연예인으로 살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만 범부는 달팽이처럼 능력이라는 껍질 속에서 느리게 사는 것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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