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왕년에는 나도...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 11. 17:55

 

 

동안거 중이라 집안에만 있다 보니 무료해서 옛날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 으뜸으로 뽑은 추억의 사진 한 장이다

1970년이다

고등학생 시절 사진이다

전국의 지방에서 전래하는 향토 민속예술을 발굴해서 계승하자는 취지의 경연대회에 우리 학교가 충청남도를 대표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참가하는 놀이의 주제는 정월 대보름에 충청도 지방에서 하던 쥐불놀이인 "횃불 쌈 놀이"였다

전국 민속경연대회는 대통령이 임석하는 대규모 문화 행사였다

하회 가면극, 봉산 탈춤, 안동 차전놀이, 고 싸움 놀이, 의성 가마싸움, 결성 농요 등이 이즈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발굴되어 지금까지 지방 축제의 핵심으로 보존되고 있는 대표적 민속놀이들이다

당시에는 민속예술경연대회라고 했지만, 지금은 청소년 민속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행사가 열린다

행사는 가을에 전국 체육대회를 전후해서 치러졌고 대규모 행사라 지역사회가 총동원되어 열기가 대단했다

우리 학교가 행사 참여 학교로 지정되자 놀이 연출을 맞은 전문가들이 학교에 와서 전교생을 모아 놓고 배역을 정했다

전국 규모의 행사에는 학생동원이 당연시되던 시기이었고 대전에서 열리는 행사라 대규모 학생을 동원하여 큰 상을 노리는 민속놀이이었다

체격이 당당하고 목소리가 우렁찬 학생은 대장군, 날씬하고 예쁜 학생은 아녀자, 키가 작은 학생은 아동으로 뽑혔다

대장군 두 명, 아녀자 20명, 아동 20명을 제일 먼저 선정했는데 아녀자 20명에 내가 들었다

아녀자 20명에서도 절반은 할머니이거나 기생이었고 댕기를 맨 처녀는 10명이었는데 나는 처녀역이었다 

오후에 수업이 끝나면 매일 연습을 했다

300명이 넘는 싸움꾼들은 기마전처럼 대장군을 어깨에 태우고 운동장을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싸움꾼들은 강행군 연습으로 지쳐서 쓰러지기도 했다

싸움꾼들이 땀을 흘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닐 때 아녀자와 아동역은 나무 그늘에서 장구 장단에 맞추어 춤을 배웠다

유명한 무용학원의 원장이 할머니춤, 기생춤, 아가씨춤, 아동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연습을 마치고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최종 연습을 할 때다

당시의 사회는 3선 개헌 직후라 전국적으로 개헌반대 학생 시위가 격화되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교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이었다

연습하는 운동장 밖에는 전투경찰이 포위하듯 운동장을 지켰다

운동장 스탠드에는 대전 시내 중, 고등학교 여학생 수천 명이 동원되어 카드섹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등장하자 카드섹션을 하던 여학생들이 여자 한복을 입은 남학생을 보고 웃느라고 집중을 하지 못해서 연습을 중단했다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아이돌 그룹이 온 것처럼 여학생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아녀자의 뜨거운 인기에 고무되어 선생님들이 쉬는 시간에 축구시합을 제안했다

아녀자팀과 아동팀의 축구 시합이었는데 나는 아가씨팀의 골키퍼였다

댕기 머리 아가씨가 치마를 펄럭이며 공을 몰고 다니고, 도련님 복장의 아동들이 넘어져서 구르면 여학생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운동장 밖에서 경비하던 전투경찰도 모두 들어와 구경했다

골키퍼인 나는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공도 치마를 벌리고 치마로 잡아서 재미를 더 했다

아이돌 그룹의 공연도 국가대표의 축구시합도 이처럼 재미있는 구경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찍은 사진이다

행사 홍보 사진사가 찍어준 사진인데 이제는 색마저 바랬다

왕년에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재미있는 추억을 담고 있지만 이 사진은 특별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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