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황률(黃栗)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0. 9. 06:34

마누라는 밤벌레다

산에서 밤을 주워다 주면 냄비에 삶아서 온종일 그것만 까먹는다

좋아하는 과일도, 빵도 뒷전이다

재정이도 따라서 간식으로 밤만 먹는다

밤살을 파내어 동그랗게 뭉쳐 주면 날름날름 받아 먹는다

산에 가서 힘들게 밤을 주워 오는 나는 밤을 안 먹는다

겉 껄질과 속 껍질을 하나하나 까먹는 일이 좀스럽고 성가셔서 그렇다

맛은 있지만 먹기가 까탈스러운 것이 밤의 문제다


산에서 밤 줍는 일이 재미있어도 많이 줍지는 않는다

많이 주워봤자 간수가 어려워서 그렇다

주워온 밤을 하루만 두면 온 집안에 밤벌레가 스멀거린다

구더기처럼 생긴 밤벌레가 거실, 베란다, 주방까지 돌아다닌다

냉장고에 넣어도 벌레가 생기는 것은 도리가 없다

예전에 어른들이 땅에 묻어 저장하던 생각이 나서 물통에 흙과 섞어 밤을 묻어 두었더니 모두 썩어버렸다

욕심껏 한 자루를 주어왔던 해는 벌레 때문에 몇 개 먹지도 못하고 모두 내다 버렸다

시장에서 파는 싱싱한 밤은 수확해서 살충처리를 하고 저온창고에 보관해서 신선도를 유지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산에 밤은 많지만 벌레가 생기고, 오래 두면 말라서 먹을 수 없는 것도 밤의 문제다


해결하기 어렵거나 대응하기 곤란한 일을 문제라도 한다

살면서 한시라도 문제가 없는 때는 없었다

큰일, 작은 일, 내 일, 집안일로 문제가 생겨서 고민을 하고 그러한 문제를 풀어내는 과정의 연속이 삶이었다

모순덩어리인 삶의 문제들을 엉킨 실타래 풀어내듯 살아가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과 엉킴의 정도에 따라서 풀리기도 하고 꼬이기도 한다


문제가 있으면 답도 있다

병이 있으면 약도 있다

문제가 생기면 풀어낼 방법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 동네는 밤이 지천이다

시장에서 파는 신품종 굵은 밤이 아니고 도토리만 한 토종밤이다

밤이 나는 금병산은 토속 종교인 수운교(水雲 최재우를 교조로 하는 동학계통의 신종교)  본당이 있는 풍수 길지다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다녀가는 곳이다

수운교가 있어서 6.25전쟁 때에 북한에서 피난 온 수운교 신도들이 정착하여 마을이 생겼다

이웃에 사는 팔십을 넘긴 어르신도 함경도에서 피난을 왔는데 오로지 금병산이라는 지명만 찾아서 내려왔다고 한다

피난민들은 산골짜기를 개간하여 농토를 일구고 도토리를 주워서 묵을 만들어 파는 것이 생계수단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생활이 안정되자 주변 산에 많은 밤나무를 심었다

얼마 전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피난민 마을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금병산 자락에는 빈 집터와 밤나무만 남았다

군부대가 있어도 주민들은 금병산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산에서 밤과 도토리를 주워도 통제를 받지 않는다

금병산은 그런 연유로 밤이 많다


마누라가 벌레 먹은 밤을 버리라고 모아놨다

밤을 너무 좋아해서 밤벌레라고 놀림을 받는 마누라도 밤벌레는 질색이다

벌레 먹은 밤을 들고 쓰레기장으로 가는 길에 이웃집 어르신을 만났다

벌레가 생겨 밤을 버린다고 하니 어르신이 깜짝 놀란다

애써 주워온 아까운 식량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고 야단까지 친다

어르신은 시간이 날 때마다 밤을 주워다 모아 두는데 피난민 시절 방식대로 햇볕이 잘 드는 마당에 널어 말린다고 했다

말린 밤, 황률을 만든다는 것이다

잘 마른 황률은 시장에 내다 팔아서 가용돈으로 쓰고, 벌레가 먹어서 부서진 것은 밥에도 넣어 먹고, 죽이나 떡을 해서 먹으면 아주 좋다는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복사한 사진) 


버리려던 밤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어르신이 일러준 대로 햇볕이 잘 드는 곳에 펴서 널었다 

며칠간은 벌레가 나왔지만 참새와 까치가 모두 잡아먹고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보름 정도 지나니 밤이 바싹 말랐다

발로 밟고 몇 번 비비니 겉껍질과 속 껍질이 부서져 노란 밤의 속살이 나온다

쉽다

아주 쉽다

벌레가 있건 말건 상관없고 껍질도 저절로 까진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황률 한 줌을 마누라에게 보여 주었더니 아주 좋다고 흡족해한다

밤이 마누라의 가을 한 철 간식에서 일용간식이 된 것이다


마누라가 끝물 밤이라도 주워 오라고 성화다

벌레 때문에 주저했고, 껍질 때문에 싫어했던 문제들이 어르신의 지혜와 가르침으로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참새와 까치도 어서 밤을 주워 오라고 이른 아침부터 창가에서 설치며 운다


내 문제의 답은 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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