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쓸개 빠진 놈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1. 23. 17:50

아주 오래전 직장 동료가 담낭 절제 수술로 입원하여 문병을 하러 갔었다

당시에는 의술이 후진적이어서 배에 깊고 넓은 수술 흉터가 남는 큰 수술이었다

문병을 하러 가서야 쓸개를 떼어냈다는 사실을 안 나는 쓸개 없이도 사람이 생명을 부지하고 살 수 있는지 잔뜩 주눅이 들었다

얼마 후 동료는 치료를 끝내고 업무에 복귀하였다

동료는 전과 다름없이 구내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고 회식 때에는 조금이지만 술도 마셨다

본인도 건강에 대해서 무척 조심하였고 직장에서도 많은 배려가 있어서 정년까지 무사히 근무하고 퇴직하였다

별명은 쓸개 빠진 놈이 되었고 본인도 실수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쓸개가 빠져서 그렇다고 넉살을 부렸다


당시에는 건강에 대한 관심도 덜 했고 지식도 부족해서 쓸개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시절이었다

고기를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을 도살하면 제일 먼저 잘라서 버리지만 웅담이나 우황처럼 약용으로는 귀하게 쓰인다는 정도다

쓸개의 쓴맛은 고통이나 낭패를 상징하여 부정적 용어이기도 하다

지금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어서 관심만 가지면 쓸개가 무슨 역할을 하는 장기인지, 무슨 병이 생기는지, 어떻게 치료를 하는지 소상히 알 수가 있다

심지어는 담낭 절제술의 전체 치료과정을 기록한 환자의 병상일기도 부지기수라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는 이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쓸개는 오장육부 중에서 육부에 해당하는 장기이다

손끝에 가시만 박혀도 고통스러운 것처럼 인체를 구성하는 장기는 어느 것 하나 허튼 것이 없고 소중하다

소중한 장기의 상호작용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근원이다

심장과 폐와 같이 치명적인 장기는 예외이지만 없으면 불편하기는 해도 생명 유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도 있다

이해하기 쉬운 예가 이가 빠지면 잇몸이 이의 역할을 대신하여 섭생을 도와주는 것이다

장기 중에는 역할이 불분명한 맹장이 대표적이다

간에서 생성한 소화액을 잠시 담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십이지장으로 보내주는 담낭도 의외로 절제가 많은 장기다 


쓸개가  없는 동물도 있다

사슴, 말, 쥐, 비둘기는 쓸개가 없다

녹용을 얻기 위해 사슴을 기르는 사람은 사슴이 죽기 전에는 사슴을 만져보지 못한다

녹용을 채취할 때도 마취로 기절을 시켜야 가능하다

매일 먹이를 주는 주인이 사육장에 들어가도 겁이 많아서 도망을 치느라 날뛰고 소란을 피운다

줏대가 없고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빗대어 쓸개 빠진 놈이라고 하는데 그 유래가 그러한 사슴의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쓸개는 음식물 소화기관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기운이 나오는 상징물이다

쓸개는 한자로 膽인데 대담하다, 담력이 있다는 표현으로 쓸개에서 나오는 힘이 용기임을 알 수 있다

용기가 없어 겁이 많은 사슴이 사육장에서 주인조차 무서워 도망치는 것을 보면 쓸개 빠진 놈이 분명하다


올해 여름 폭염이 대단했던 삼복더위에 나는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로 시달렸다

가슴을 쥐어짜는 복통이 오고, 복통이 가라앉으면 온몸이 떨리는 오한이 온다

오한과 함께 몸살처럼 기운이 빠지고 39도를 넘나드는 고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재정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감기를 달고 살아서 감기가 옮았다고 생각했다

동네 병원에서도 기침과 콧물은 없어도 감기라고  했다 

감기약을 먹으면 신통하게 복통도, 오한과 고열도 감쪽같이 낫는다  

그러한 열감기는  열흘 정도 주기로 반복되었다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열감기에 마누라가 큰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별 것 아닌 감기로 호들갑을 떤다고 눈을 부릅뜬 것은 나였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겨보자고 허세를 부린것도 나였다

결국 마을 축제인 단풍길 걷기에 따라나섰다가 쓰러져 큰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입원을 하여 며칠간 검사한 결과는 뜻밖에도 담도염이었다

염증으로 막힌 담도를 내시경으로 뚫기는 했지만, 염증이 가라앉으면 담낭을 절제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담낭과 담관이 담석으로 인해서 염증이 생기면 수시로 재발을 하고 재발이 반복되면 악성으로 발전할 가능성 높으니 담낭을 떼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사의 설명이다


이제 나는 쓸개 빠진 놈이 된다

겁이 많아서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살아가는 사슴처럼 매사를 두려움에 떨면서 살지도 모른다

문제지역, 사고지역에 해결사로 불려다니던 직장생활 시절의 호기와 대담함은 떼어낸 쓸개와 함께 영영 사라지는 것일까? 

쓸개를 떼어낸다니 가슴이 먹먹하고 두려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전처럼 개복하는 대수술이 아니고 복강경을 통해서 작은 구멍으로 하는 간단한 수술이라고는 해도 부모님이 주신 몸에 처음 칼을 댄다니 마음이 심란하다

담배는 피우지만 술도 마시지 않고 나름대로 조신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위기가 닥치면 살아남기 위해서 신변을 정리하는 것도 본능인가 보다

담도의 염증을 치료하고 퇴원해서 집에서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무척 바빴다

마누라와 약속했던 베트남 여행을 힘들게 다녀왔다

주말농장의 무와 배추를 수확해서 이르게 김장도 담갔다

배추를 수확한 자리에 마늘도 심었다

옥상과 집안 대청소를 하고 동안거 준비도 마쳤다

고향에 가서 부모님 산소에 성묘하고 밭에 심은 호두나무도 둘러봤다  


내게 닥친 시련은 오롯이 내가 짊어질 숙명이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 또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쓸개 빠진 놈들이 설치는 세상이라 쓸개를 떼어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도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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