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자꾸 빤쓰

재정이 할아버지 2019. 1. 22. 17:08

황당함이 신기함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찜질방에 갔다. 추운 날, 단독주택에 사는 나의 추위 피난처는 찜질방이다. 불가마에서 흥건히 땀을 흘리고 황토방에 누워서 쉬고 있을 때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던 할머니가 돈을 잃어버렸다고 구시렁거렸다. 잠을 자거나 누워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떨떠름히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함께 온 딸에게 목마르면 음료수를 사 먹으려고 자꾸 빤쓰에 넣어둔 돈이 없어졌다는 말만 반복했다. 목욕하고,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황토방에서만 있었으니 여기서 빨리 찾아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누워있던 매트 밑을 들춰보고 옷도 털어 보며 혹시라도 흘린 돈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찜질방에서는 현금과 핸드폰 분실 사고가 자주 일어나니 주의하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있다. 주의하라는 안내문이 있기는 해도 마땅히 주의할 방법이 없는 곳이 찜질방이다. 찜질복에 주머니가 있기는 해도 헐렁해서 모르는 사람들과 뒤섞여 잠을 자다 보면 현금이나 핸드폰을 흘려서 잃어버리기에 십상이다. 나쁜 마음을 먹고 훔치려면 식은 죽 먹기인 곳이 찜질방이다.

 

다행히 할머니의 돈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목욕하고 갈아입은 할머니의 자꾸 빤쓰를 딸이 탈의실에서 가져오니 거기에 돈이 들어 있었다. 경증이지만 치매를 앓아서 사리 분별이 어두운 할머니가 물건 간수를 못 해 일어난 일이니, 이해를 바란다고 딸이 사과해서 황당한 일은 수습이 되었다

 

돈을 찾아서 안심되자 할머니가 돈을 넣어 두었다는 자꾸 빤스가 궁금해졌다. 나도, 아내도 처음 듣고 모르는 것이었다.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황토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 모르는 것이어서 딸이 들고 있는 자꾸 빤쓰를 보여달라고 했다.

딸이 들고 있는 자꾸 빤스는 주머니가 달린 여성 팬티였다. 주머니를 닫도록 지퍼가 붙어 있어서 할머니들이 자꾸 빤스라고 한다는 것이다. 치매로 할머니가 돈을 자주 잃어버려서 비상금을 가지고 다니도록 딸이 사준 것이라고 했다. 주머니가 달린 할머니 자꾸 빤스를 보는 순간 황토방 사람들이 신기해서 파안대소했다.

 

발명이나 제안의 시작은 불편함이다. 발명이나 제안을 하는 사람의 특징은 머리가 좋고 게으른 사람이다.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발명할 수가 없다. 시켜서 하기는 해야 하는 일인데, 게을러서 하기는 싫고 쉽게 하는 방법을 찾다 보니 발명이 된 것이 대부분이다.

 

자꾸 빤쓰는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살아 계셨다면 백수를 넘긴 어머니는 평생 한복만 입으셨다. 한복에는 주머니가 없다. 내가 용돈을 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아무 곳에서나 치마를 걷어 올리고 고쟁이에 바느질로 만들어 붙인 주머니를 찾는다. 고쟁이 주머니는 옷핀으로 꿰어 있다. 옷핀을 풀어야 손수건 쌈지를 꺼낼 수 있다. 손수건 쌈지를 풀어야 돈을 꺼낸다. 이렇게 복잡하고 불편했던 어머니의 비상금 주머니가 자꾸 빤스로 개량되고 발전을 한 것이다

 

집에 와서 신기한 자꾸 빤스를 검색해 보니 나만 모르고 있었다. 사용하는 방법이 수치스러워 내놓고 말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병원과 양로원에 입원하는 노인에게는 필수품이고 해외여행을 가는 중, 장년들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해외여행 자유화 초기에 우리나라 여행자들의 무례와 몰상식은 현지에서 많은 지탄을 받았다. 지금은 중국과 인도 여행자들의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고 우리가 비웃고 있지만, 과거 우리의 모습도 그랬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여행에서 저지른 무례 중 첫째는 할머니 고쟁이 쌈짓돈이었다. 효도 관광으로 해외에 나간 할머니들이 선물을 사고 돈을 낼 때면 치마를 걷어 올리거나 바지를 내리고 고쟁이에서 돈을 꺼내는 바람에 종업원들이 기겁했다고 한다. 지금도 할머니들이 자꾸 빤스에 돈과 여권을 넣고 다닌다고 하니 필요할 때 어떻게 꺼낼까 상상이 안 된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나는 당장에 시장으로 달려가 색깔 고운 분홍색 자꾸 빤쓰를 사서 어머니께 선물했을 것이다. 얼마나 좋아하실까.

평생을 밭에서 농사지으며 땀에 절어 사신 어머니가 고쟁이에 감춰둔 돈을 쥐여 주시던 그 거친 손결, 쩐내 나던 돈 냄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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