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나 어떡해

재정이 할아버지 2019. 6. 28. 07:02



숲을 헤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나 어떡해" 라는 탄식으로 들렸다

마을을 조성하면서 산을 깎은 자리에 시멘트 옹벽을 높이 쌓았다

옹벽 아래로 산책로가 있고 그 길을 가고 있었다

내 키로 두길은 족히 넘는 옹벽 중간에 생뚱맞게 아까시나무가 매달렸다

아까시나무가 "나 어떡해"라면서 나를 불러 세운 것이다


옹벽 중간에는 동전 크기의 배수공이 뚫려있는데 그 배수공에 아까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누가 심었을 리 만무하고 바람에 날렸는지 물을 따라 내려왔는지 씨앗이 떨어져 싹이 튼 것이다

산도 많고 들도 넓은데 하필이면 시멘트 구멍에 뿌리를 박았을까

아까시나무는 산에서도 들에서도 공원에서도 보이는 대로 뽑아 버리는 천덕꾸러기 나무이다

마땅히 쓸 곳도 없으면서 번식력이 강하고 가시가 많아 귀찮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나무가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시멘트 틈에서 모질게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나무지만 아까시나무에는 소중하고 하나뿐인 생명이다

아까시나무도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좋은 나무와 어울려서 오래도록 거목으로 자라고 싶을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 재수 없이 옹벽의 구멍에 태어났을 뿐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태어나는 것만은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다

소싯적에 농사짓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콩밭에서 김을 맸다

땡볕 밭고랑에 앉아서 땀으로 멱을 감으며 나는 왜 도시의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도시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선풍기 앞에서 만화책을 읽을 시간에 콩밭을 매는 내가  싫었다

도시 중학교에 가서 미국 영화를 처음 봤다

얼굴도 하얗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백인이 부러웠다

납작코에 까무잡잡한 얼굴, 키 작은 동양인으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웠다

삼복더위에 입대했다

장마철 각개전투 훈련장에서 진흙 벌을 쑤시고 다니며 생각했다

이념으로 분단된 나라에 태어나서 황금 같은 청춘에 왜 이런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분하고 억울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은 하나 같이 싫었지만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엎질러진 물이었다


생명의 탄생에는 3가지 자기가 결정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는 것

둘째는 능력이 평등하지 않은 것

셋째는 미래를 모르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사춘기쯤 나이에 "나 어떡해" 라면서 깨닫게 되는데 알아도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쓸모없는 아까시나무가 옹벽에서라도 살겠다고 매달려 있는 모습은 과거의 나다

나는 실수로 태어났다

가임기가 지나 방심하다 생긴 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주변에 병원이 있었다면 아까시나무 뽑듯 버려질 생명이었다

이미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둔 어머니는 늦둥이를 배에 싣고 기왕에 생겼으니 딸이기라도 바랬다

생기지 말았어야 했고, 딸이어야 했는데 내가 고추를 달고 태어나자 어머니는 나를 윗목에 밀어 놓고 돌아누웠다

위형과는 여섯살 터울이다


아홉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형제들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 어린 막냇동생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를 붙들고 울었다

쓸데없는 놈이 태어나서 아버지의 그늘 없이 살아갈 나의 앞날이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내가 방황할 때마다 나를 붙들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탄식을 했다

신혼여행지 까지 따라올 정도로 못 미더운 내 옆을 맴돌다가 돌아가셨다


생명의 탄생은 신의 영역이다

신이 생명을 내릴 때는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좋은 곳은 좋은 대로, 나쁜 곳은 나쁜 대로 살아갈 이유와 방법을 정해서 내려 보낸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형제들이 나누어서 지고 나를 길렀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화책과 소설책을 끼고 살아도 탓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천방지축 방황하고 가출도 했었지만,  형제들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제자리로 돌려 세워주었기 때문에 내가 오늘까지 왔다

이제는 나를 기른 형제들이 노쇠하고 병약하다

내가 찾아가서 국밥이라도 나누며 아파서 어떻게 하느냐고 달래고 온다


기암절벽의 천년송도 쓸모없고 버려진 나무였다

대학교수를 버리고 대안학교에서 농사꾼이 된 윤구병 선생은 들판에 잡초는 없다고 했다

어디에도 버려진 나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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