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물 흐르듯

재정이 할아버지 2020. 2. 6. 17:12

입춘이다

경자년 새해라고 들떴던게 엊그제인데 설을 쇤다고 어정거리다 보니 달력도 한 장이 넘어갔다

벌써 절기상 봄이다

가는 세월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삶의 이치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예기치 않은 곡절을 겪으며 살아가지만 세월만큼은 언제나 정직하고 변함이 없었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에는 열매가 열리고, 가을에는 열매를 거두고, 그 열매를 먹으며 삭풍이 부는 겨울을 난다

가는 세월 순서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데 올해 겨울은 수상하다

 

길지도 않지만, 짧다고도 볼 수 없는 생을 살았지만, 올해 같은 겨울은 처음이다

손발이 시리도록 춥지도 않았고 눈 한번 내리지도 않았다

동지섣달에도, 제일 춥다는 대한에도 눈 대신 장맛비 같은 비가 내렸다

올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몇 해째 덜 춥고 눈도 적게 내리기는 했다

눈이 내리면 쓸려고 사다 놓은 염화칼슘이 몇 년 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춥지 않고 눈이 내리지 않아도 겨울은 겨울이다

겨울에는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으니 종일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아서 TV나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운동경기 중계도 없으니 다큐멘터리나 뉴스만 돌려가며 본다

겨우내 지겹게 본 뉴스의 핵심 주제는 법이다

 

모든 나라가 국가를 구성하고 사회의 규범을 정하는 것이 법이다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는 유럽이나 권력자의 판단을 우선하는 중국 같은 나라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법이 우선이다

인재들이 대학의 법대에 모이고 사회지도층 대부분이 법관 출신인 이유다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라도 뉴스에서 법 이야기만 보고 들으니 우리나라 웬만한 사람은 법률 전문가다

입법 기관인 국회에서 어떻게 법이 만들어지는지, 만든 법은 어떻게 효력을 발생해서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지, 법률가처럼 견해를 밝히는 수준까지 가르쳤다

국회의원들이 법의 존폐를 두고 악착같이 싸우는데 싸우는 이유가 국민을 위해서 라고하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 무슨 법인지 알고도 싶었다

겨우내 국회의원들이 볼썽사납게 싸운 법안들은 아무리 뜯어 보아도 국민인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법들이다

내가 국회의원이 될 일이 없고, 검찰청이나 경찰서에 잡혀갈 만큼 나쁜 짓을 할 위인도 못 된다

 

법이라는 글자를 파자해서 보면 삼수 변에 갈 거 자로 물이 가는 길이다

항상 아래쪽 平한 곳으로 흘러서 바다에 이르면 모두 하나가 되어 和를 이루는 것이 물이다

물이 흘러가듯 막힘없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법이라는 뜻이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면 강물이 구불구불 느리게 흘러간다

산이 있으면 돌아가고 바위가 있으면 피해서 간다

도로는 산을 깎아 지름길을 만들고 강이 있으면 다리를 놓아 건너서 간다

산과 협상하고 바위와 타협하는 물길이 좋은 법이라면 산을 겁박해서 깎아내리고 현혹한 바위를 깨서 만든 도로는 나쁜 법이다

느리고 먼 길을 돌아가지만 산은 산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살고 싶은 곳에서 살게 하는 것이 좋은 세상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산을 허물고 바위를 깨서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면 목적지에 빨리 갈 수는 있지만, 그 산에 살던 나무와 바위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은 생명을 잃는다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려고 입안된 법이 시간이 흐르면 강자가 약자를 구속하는 수단으로 변질하는 것이 법의 아이러니다

도둑이 많으면 형법이 많아지고 사기꾼이 많으면 민법이 강화된다

법이 복잡하고 많아서 보호 대상인 민초들이 법을 집행하는 권력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세상을 이롭게만 하는 법은 없으니 가능하면 법의 간섭이 적어야 좋은 세상이라는 말이다

 

눈이 한 번도 오지 않은 겨울 날씨는 이변이다

노아의 방주를 타야 살아남는 대 홍수 전조일 수도 있다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범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강물의 범람은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산을 허물고 바위를 깨서 만든 도로에 사태가 나는 것이 문제다

홍수로 불어난 성난 물길은 작은 쥐구멍으로 댐도 무너트린다

사태는 비가 그치고 물이 빠져도 허물어진 산과 부서진 도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재난이기 때문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범사에 긍정적인 사람을 두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한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세상은 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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