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일기

미래는 모른 채로

재정이 할아버지 2020. 11. 23. 11:33

모든 사람과, 세상의 이치를 통달해서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점쟁이는 몹시 불행할 것 같다

자신의 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의 일이라도 미래를 미리 알아버리면 사실대로 말하기도 어렵고 말해주지 않아서 닥쳐올 불행을 막지 못한 책임에 괴로운 삶을 살게 될 것 같다

점쟁이는 미래를 알기는 하지만 바꾸어 주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에서 비롯된 나의 암투병은 수술 일정이 잡히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암이라는 무서운 병이 왜 나에게 생겼을까,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치료비는 얼마나 들까.....

처음에는 질병과 관련된 궁금증과 그것을 규명하는 단계였다

왼쪽 폐에 4개, 오른쪽 폐에 2개의 결절이 암으로 의심된다고 크기까지 적시했고, 과거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왼쪽에서 오른쪽 폐로 전이된 폐암 말기라고 좌절감을 안겨주었던 건강검진 병원.

건강검진 병원의 역할과 임무는 의심되는 환자를 찾아내어 상급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니 나에게 겁을 주어 지체 없이 치료를 시작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임무는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갑자기 밀려온 고난에 황망히 찾아간 대학병원은 냉정하고 침착했다

건강검진 CT는 싸구려 검사라 정확도가 떨어지니 고급 CT로 다시 검사를 해보자고 흥분된 나를 진정시켰다

검사 결과는 오른쪽 폐에 초기 암으로 보이는 결절이 하나 있고, 수술로 치료가 가능할 것 같다는 진단을 했다

주변 지인들이 경험으로 권하기를 최소한 세 곳 정도의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고 치료방법을 결정하라고 했다

서울의 상급병원을 갔다

서울 상급병원의 진단은 대학병원 진단과 일치했다

폐암 치료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었는지, 전이가 되었다면 얼마나 되었는지가 치료의 열쇠다

암 진단 한 달 만에 속전속결로 서울 상급병원에서 치료하기로 결정한 이유다

 

서울 상급병원의 특징은 신중함이다

수술하기로 합의를 하고도 수술일자는 모든 검사가 끝나고 정한다

온갖 검사로 한 달을 보냈다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수술방법을 정하고 날자를 잡았다

한 달 뒤 수술, 최초 암 진단으로부터 석 달이 걸렸다

 

암 수술 일자를 잡고 나니 내가 바빠졌다    

며칠 여행을 가도, 다녀와서 손댈 곳이 없도록 대청소를 하고 가는 나다

공직생활이 몸에 배어 집안의 대소사도 미리 계획을 세우고 일정과 예산까지 문서로 작성하는 성미다

한 달 뒤에 나는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살아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활동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합리적 추측이다

암, 그것도 치명률이 제일 높다고 악명 높은 폐암 수술이 한 달 뒤 나에게 닥친 운명이다

 

병원비는 모두 내가 마련한다

얼마 안 되지만 퇴직 후에 우리 사주를 팔면서 남겨둔 주식을 현금화시켰다

친구에게 빌려주었던 돈도 받아냈다

죽어서 내가 떠나도 나로 인해서 가족이 경제적으로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준비해둔 돈이다  

병원비는 내가 결제하고, 교통비와 밥값 등은 마누라가 내도록 암묵적 합의도 이루어졌다

 

수술일자가 11월 중순이다 보니 김장과 겹친다

병원에 가기 전에 김장을 하지 않으면 김장을 못할 수도 있다

주말농장을 하는 목적이 "내가 농사지은 청정 채소로 김장을 담자"이므로 이른 김장을 했다

이웃들은 속도 모르고 잘 자라는 어린 무와 배추를 왜 수확하느냐고 수군거리지만 내 속 마음을 어찌 알랴

내가 암수술을 한다는 것은 아직 형제에게도 비밀이니 이웃들이 알턱이 없다

 

집안에 고장 나 손볼 곳은 없는지 찾아보니 현관과 지하실 전기가 고장 났다

기술자를 불러 이틀간 수리를 마쳤다

보험 갱신과 구청 임대사업자 신고도 미리 마쳤다

집안에 의미 있는 행사가 생기면 행사 전에 집안에 고장 난 것들을 모두 고치는 습성이 우리 집에 있다

 

아들이 경기도로 출장을 자주 가는데 오래된 경유차를 타고 있어서 미세먼지가 발생하면 단속에 걸릴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들에게 자동차 구입비 일부를 지원해주고 새 차를 사도록 했다

아들 차는 깨끗해서 내가 타면 되고 20년이 넘은 내차는 폐차를 했다

오래된 김치냉장고를 쓰고 있는 마누라에게도 선물이라 생각하고 김치냉장고를 사주었다

 

불확실성이 고조된 나의 미래

나의 미래가 결정될 그날을 기다리며 나와 나의 집, 그리고 가족들의 문제까지 할 수 있는 정리는 모두 끝냈다

한 달 동안 참 많은 일, 미루고 방치했던 일들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용한 점쟁이가 한 달 뒤의 내 운명을 말해주었다면 그 말을 믿고 지금 나처럼 미래를 준비했을까

어찌 보면 내가 믿는 점술가는 건강검진센터가 아닌가 싶다 

의사는 과거와 현재의 건강상태를 알려주고 미래를 위해 치료를 해주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용하게 짚어내는 점쟁이가 있다고 해도 불행에서 탈피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모른 채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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