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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병원 생활

11월 17일은 내가 폐암을 수술하는 날이다 마누라는 며칠 전부터 여행 가는 사람처럼 여행가방을 꾸렸다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며 들고 다니던 캐리어도 낡아서 새로 샀다 코비드 19가 종식된다 한들 이제는 해외여행 가기는 글렀다 그러면서도 해외여행 갈 때나 쓸법한 고급 캐리어를 산 것은 이제부터 우리의 여행지는 병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편하고 산뜻하고 좋은 물건만 좋은 가방에 담아서 병원에 가자는 뜻이 숨어있다 입원 예약시간은 오후 3시다 시내버스를 타고, SRT를 타고, 셔틀버스를 타고,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했어도 시간 여유 있게 병원에 도착했다 서울 상급병원은 입원하는 날 아침에 전화 문자로 예약된 병실을 알려줘서 바로 병실로 가면 된다 코로나 때문에 문병이 금지되고 보호자도..

투병일기 2020.11.23

미래는 모른 채로

모든 사람과, 세상의 이치를 통달해서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점쟁이는 몹시 불행할 것 같다 자신의 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의 일이라도 미래를 미리 알아버리면 사실대로 말하기도 어렵고 말해주지 않아서 닥쳐올 불행을 막지 못한 책임에 괴로운 삶을 살게 될 것 같다 점쟁이는 미래를 알기는 하지만 바꾸어 주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에서 비롯된 나의 암투병은 수술 일정이 잡히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암이라는 무서운 병이 왜 나에게 생겼을까,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치료비는 얼마나 들까..... 처음에는 질병과 관련된 궁금증과 그것을 규명하는 단계였다 왼쪽 폐에 4개, 오른쪽 폐에 2개의 결절이 암으로 의심된다고 크기까지 적시했고, 과거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왼쪽에서 오른쪽 폐로 전이된..

투병일기 2020.11.23

黎明의 시간에

새벽 6시. 집을 나선다. 여느 때 같으면 잠자리에 뭉개고 누워있거나 TV로 뉴스를 보고 있을 시간이다.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봉급쟁이의 생활습관은 대부분 그렇다. 은퇴 후에도 생활습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명의 시간에 이렇게 집을 나서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일이다 길을 나서니 소싯적에 읽었던 스님의 글귀가 또 나를 붙잡는다. 어디를 이렇게 급히 가시느냐고 스님이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스님에게 대답했다. 밭에 일하러 갑니다. 조카 결혼식에 갑니다. 손자 보러 아들 집에 갑니다. 공부하러 학교에 갑니다...... 모두 그렇고 그런 연유로 바쁘게 길을 가야 하는 사정이다. 스님은 하늘을 바라보며 헛헛하게 웃었다. 바보들, 결국은 죽으러 가는 길인데..

투병일기 2020.10.24

헛 살았다

古稀가 불원인데 이제야 헛살았음을 깨달았으니 나는 바보다 人生七十古來稀 사람은 70살 나이 먹도록 살기가 힘들다는 말인데 그 나이에 임박해서 보니 그 말부터가 헛 것이다 나이가 비슷한 내 친구들 거의 모두는 아직 팔팔하고 멀쩡하다 경로당에도 못 간다 웬만한 시골에서는 청년단원이다 나이 70을 이르는 말 중에 고희보다는 공자가 말했다는 從心에 마음이 간다 나이 70을 넘기면 마음먹은 대로 처신해도 법도에 그르지 않더라는 말이니 내가 그렇다 돈도, 명예도, 건강도 이제는 하늘의 섭리에 따르리라고 결심을 하고 나니 누구에게라도 진심을 말하는데 거리낄 것이 없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안 한다 살 만큼 살았다는 고희에,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나이인데 어쩌다가 한낱 미생물인 바이러스에 진 세상을 산다 세상을 지..

생원일기 2020.10.11

물장난

침수된 도로가 물놀이장이 되었다 대전천 하상 주차장이다 차는 없고 물놀이하는 아이들만 모였다 평생 이런 물난리는 처음이다 지루한 장마가 달포를 넘겼다 매일 오는 비가 지루하기도 하지만 내렸다 하면 폭우라 온 세상이 물바다다 노아의 방주라도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대전의 명소 목척교 아래 아이들은 물에서 신나서 뛰놀지만 이 물은 수많은 민초들의 눈물이다 밀려든 토사에 삶의 터전을 잃고 논밭이 물에 잠기고 아까운 생명이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이 무엇을 알랴 도로 까지 넘쳐흐르는 빗물이 신기한 놀잇감일 뿐이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달려보는 개울물 자연재해로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느낀다 물놀이는 즐겁지만 성난 물은 재앙이다 불난 집은 재라도 남지만 물은 티끌까지 쓸어간다는 옛말이 새삼스러운 나날이다 훗날 아이들에..

5년 묵은 재정이

아이들에겐 모든 날이 특별하지만 그중에서도 생일이 으뜸이다 8월 1일이 생일이라 한 달치 생일을 모아서 치르는 어린이집에서도 재정이는 제 날에 생일 행사를 맞는다 촛불 다섯 개를 밝히는 재정이 생일 케이크 이제는 5년 묵은 중고품이다 삼복더위에 맞는 생일이라 집에서는 간단히 촛불만 밝힌다 탈 없이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수팥떡과 간식으로 잘 먹는 수제 햄버거를 엄마가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농사지은 토마토는 재정이가 아기 때부터 제일 좋아하는 토마토 수프 재료다 다섯 번째 생일의 축하인사는 동생 재민이의 볼 뽀뽀가 백미였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재정이가 이발을 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땀이 많이 나서 시원하게 잘랐다 고무줄로 머리를 묶고 다니던 재민이도 미용실에서 재정이가 조용히 머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얘들이 왜 이래?

아들이 사진을 보내왔을 때 내 눈을 의심했다 밥그릇을 들고 서 있는 처량한 모습 손자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 일까 따듯한 밥 먹이고 따듯한 옷 입히고 따듯한 곳에 재우고 싶은 것이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의 헌신은 부모가 되어서야 겨우 조금 알게 된다 어린것들이 부모 마음을 알 턱이 없다 엄마가 따듯하게 밥을 지어 상에 올리면 손자들은 밥이 뜨겁다며 이런 자세와 이런 표정으로 선풍기 앞에 서서 밥을 식혀 먹는다고 한다 반찬도 마찬가지다 하나하나 들고 가서 식혀 먹는다 그렇다고 찬밥에 찬 반찬을 먹일 수 없는 것이 부모다 아이들은 먹어 보고 익숙한 음식에만 관심을 갖는다 전복이 먹고 싶은 것이 아니고 먹을 줄도 모른다 시장에 따라 갔다가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커다란 생선을 보고 물고기라는..

펜션에서 1박 2일

재정이, 재민이가 아빠 직장 동료들과 펜션으로 여행 가는 날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펜션에서 단체로 1박 2일은 처음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 금산의 적벽강이다 가는 길에 재민이가 좋아하는 소방차를 가까이에서 보여 주었다 재민이는 특장차 애호가다 동네에 있는 소방서를 지날 때 마다 재민이는 소방차를 보면 환호를 한다 재민이 소원 하나가 풀렸다 펜션에 도착해서 물놀이 가는 길 달구지처럼 개조한 차량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처음 만나 낯이 설고 전장으로 떠나는 심정이라 아이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돈다 전쟁물자 물을 퍼 담고 무기를 점검해서 지급받고 실전에 투입되어 전사가 된다 놀다 지치면 그늘에 앉아 간식을 먹는다 어둠이 깔린 펜션의 밤 아이들에게는 숲 속의 밤공기가 처음이지만 폭죽놀이는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

재민이는 사과나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코로나 19 세상은 금방 인류가 멸망할 것 같은 절망적 상황이지만 시련의 날들을 견디고 지나가면 오늘이 인류가 겪은 재난의 역사가 된다 코로나 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격리는 사람이 무섭고,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을 피해서 멀고도 한적한 목장에 재정이 재민이가 나들이를 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병아리 재민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아리다 세상 곳곳에서 코로나 19 감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병들고 힘겨워하고 있다 치료약도 없고 예방할 백신도 없으니 마스크 한 장에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 요행에 기대어 살고 있다 병아리와 재민이는 알리가 없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혼돈에 빠졌지만 동물은 여전히..

재민이의 걱정

무슨 걱정일까?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것도 아니고 형과 싸워서 삐진 것도 아니고 보수가 선거에 참패하여 낙담해서 저러는 것은 더욱 아니다 심각한 얼굴로 가끔 이렇게 숨을 곳을 찾는 재민이 빈방이나 옷장 속에 숨더니 이제는 가구 빈 틈에도 숨는다 숨어있다가 나올 때 표정은 사뭇 다르다 큰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얼굴이 환하다 해우(解憂)의 기쁨이다 아기들이란 수수께끼 문제와 같다 논리로 풀려면 어렵고 상식으로 풀면 쉽다 욕조가 있건만 꼭 물통에 앉아서 목욕을 하는 이유 고향이 그리워서? 할아버지!!! 아기 응가하는 것 목욕하는 것 사진까지 찍어서 공개하시니 쑥스러워요 저도 어린이집에 여자 친구가 있다구요 이렇게 폼나고 자세 잡은 사진만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