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채송화

재정이 할아버지 2017. 9. 7. 06:49


전봇대 밑에 빨간 꽃이 피어있다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 보니 채송화다

넓고 기름진 땅이 지천인데 하필이면 구석지고 척박한 전봇대 밑에 뿌리를 박고 꽃을 피우니 가엽다

그래서 채송화의 꽃말이 청순과 가련인가 보다

동요 "꽃밭에서"에 등장하는 채송화는 봉숭아, 나팔꽃과 함께 우리나라 토종꽃을  대표한다

채송화는 꽃이 고와도 화분에 담아서 기르지는 않는다

한철 피는 꽃은 예쁘지만 있는듯 없는듯한 줄기와 잎이 보잘것이 없기 때문이다   

채송화는 사람손에 길러지기 보다는 구석진 곳에 숨어서 피는 강인한 풀꽃이다

줄기와 잎이 다육식물 처럼 두꺼워서 어지간한 기뭄에도 끄덕없이 견딘다

채송화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려서 살던 시골집 뒷곁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산비탈을 깍아 터를 파고 자갈을 두껍게 깐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질항아리가 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부엌 뒷문을 열면 환하게 햇빛을 쪼이고 앉은 항아리가 보이는 장독대는 여자들의 공간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아궁이에 불 지피는 소리가 나면 이내 장독 뚜껑 여는 소리도 났다

햇살이 밝게 비추면 장 뚜껑을 열라하고, 구름이 짙어지면 호미를 던지고 장뚜껑을 덮으러 달려가던 곳이다

어머니가 안보여서 불러보면 장독대에서 대답소리가 났다

찝질한 소금 쩌는 냄새와 된장 삭는 꿉꿉한 냄새가 싫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장독대 주변을 맴돌았다

잔치집에 다녀오거나 장에 다녀오면 손짓으로 불러서 나를 데리고 간 곳도 장독대다

식구 많은 집에서 눈을 피해 막내 아들에게 인절미나 알사탕을 입에 넣어주던 곳이다

장독대 자갈위에 앉아서 사탕을 먹다보면 자갈 사이로 봉긋 봉긋 채송화 꽃이 피어 있었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니고 가꾼것도 아닌데 여름이 오면 해마다 어김없이 그자리에 채송화가 올라왔다

채송화가 척박한 곳에 숨어서 꽃을 피우듯 우리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힘들게 숨어서 살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아리다

우리집에 화분이 여러개 있지만 채송화는 없다

냉장고가 3개나 되지만 장독대는 없다

질항아리도 몇개 있는데 옥상구석에 거꾸로 뒤집혀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다

우리 마누라는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서 TV에서 수다떠는 여자들 이야기에 넔을 빼앗겼다

나는 그 여자들 수다스러운 소리가 싫어서 쪽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바둑을 둔다

우리집에서는 내가 채송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