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장학금

재정이 할아버지 2019. 9. 8. 14:11

배움을 장려하는 목적으로 지급되는 돈을 장학금이라고 한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지급되는 것이 관행이다. 아들이 장학생이라는 말은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대표적 자식 자랑이다. 받은 돈이 아니라 공부를 잘해서 자랑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학업을 계속하라고 지급되는 장학금도 있다. 사회안전망이다. 공부를 못해도 학교에 나오는 것이 기특해서 주는 장학금도 있다. 그런 뉴스가 있어 알았다.

 

나는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성적이 항상 하위권이었다. 수업료를 못 낼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렵지도 않았다. 장학금을 한 번도 못 받은 이유다. 아들도 아비를 닮아서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다. 내가 그랬으니 아들에게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못 하고 내버려 두었다. 굼벵이 구르는 재주는 있어서 어렵게 대학은 갔다. 공부는 못해도 매일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기특해서 장학금은 내가 주었다

 

아들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다.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은 철이 들어서 공부만 열심히 한다는데 남의 아들 이야기다. 아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봉사활동에 미쳐서 밤낮이 없었다. 학생회 완장을 차고 학교 행사에 매달려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복학을 하고 얼마 지나서 아들이 장학금을 받았다고 으스대며 들어왔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봉사활동 공로로 학교가 주는 한 학기 전액 장학금이었다. 명분이 무엇이든 아버지도 못 받은 장학금을 아들이 받아 왔으니 큰 경사였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직원 복지로 자녀 대학 수업료가 전액 지급되었다.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아들 수업료 걱정은 없었다. 식구들이 모여서 아들이 받아 온 장학금을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궁리를 했다.

 

공부 잘하라고 준 돈이니 방학 때 해외 어학연수를 가라고 했더니 공부는 싫다고 아들이 반대다. 아들에게 용돈으로 주자고 했더니 술 사 먹는다고 아내가 반대다. 엄마, 아빠 옷이라도 사 입으라고 아들이 제안했지만 귀한 돈의 가치가 흐려진다고 내가 반대했다.

 

어떻게 써야 좋을지 난감한 장학금이다. 궁핍한 사람에게는 금쪽같은 학자금이지만 여유 있는 사람에는 그저 가욋돈이다. 읽고 싶은 책을 사거나, 어학연수를 다녀오거나,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 학원에 다니면 좋은데 공부가 싫은 아들이 마다하니 방법이 없다.

 

장학금이라는 귀한 돈을 가치있게 쓰는 방법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는 내 생각에 가족들이 동의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수혜가 돌아가도록 장학금을 학교에 반납하기로 했다. 장학금을 받았다는 기쁨만 가슴에 두고 아들이 장학금 봉투를 들고 학교로 갔다. 아들은 행정실에서 가서 나보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장학금을 반납했다. 며칠 후 학교에서 아들의 뜻대로 몇 명의 학생에게 아들 이름으로 장학금을 나누어 주었다고 알려왔다

 

돌이켜 생각해 봐도 아들 장학금은 가치있게 썼다. 아들의 장학금 선행은 학교에서 알음알음 미담으로 퍼져 1년 뒤에 학생회장이 되는 보람으로 보상을 받았다. 학생회장 선거에서 아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헌신적으로 도와 주어서 가능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던 아들이 자기소개서를 썼다. 장학금을 받았지만, 그 장학금을 나보다 더 어려운 학생들에게 돌려주었더니 학생회장이 되었더라는 스토리였다. 공부도 못하고, 무엇 하나 내세울 재능도 없었지만, 자기소개서 하나는 쓸만했다

 

아들은 첫 번째 취업 지원 회사에 합격하여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다. 입사시험 면접에서 사장이 자기소개서의 장학금 이야기를 읽어 보고 그 자리에서 합격 통보를 했다고 한다. 장학금은 공부만 잘하라고 주는 돈이 아니다. 잘 쓰라고 주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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