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상수리나무의 상흔

재정이 할아버지 2019. 7. 18. 06:48

 

 

 

공원에서 베트남인 가족이 상수리나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베트남에서 연구단지에 유학 온 과학자 가족이다. 여름에 잎이 무성하다가 겨울이 오면 낙엽이 지는 나무는 아열대 지방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존재다. 과학자 아버지가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휴일에 산책을 나온 모양새다. 공원에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여럿 있는데 한결같이 가슴 높이쯤에 수술 자국 같은 깊은 상흔이 있다. 과학자 아버지와 아이는 상수리나무 상처를 만져보기도 하고 상처 구멍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관찰 중이다

 

베트남 가족 옆을 지나가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한국 일반 초등학교에 다니는 외국 아이들은 한국말을 잘해서 우리나라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초등학생은 상수리나무에 있는 상처 구멍이 왜 생긴 것이냐고 물었다. 다른 나무에는 없고 상수리나무에만 있는 상처 구멍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한국말을 잘해도 문화적 차이로 궁금하고 모르는 것이 많은 외국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영어로 오크라고 하는 참나무이다. 목재는 바비큐를 할 때 장작으로 쓰이고, 와인을 숙성시키는 통도 이 나무로 만든다. 껍질은 와인병의 마개로 쓰는 코르크다. 열매는 상수리라고 하는데 묵을 만들어 먹는다. 상처 구멍은 상수리를 따기 위해서 메로 쳐서 생긴 상처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외국인이어서 서양사람들이 참나무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설명을 해주었더니 금방 이해를 하고 아버지가 엄지 척까지 해주었다. 모르기는 해도 한국에 와서 참나무를 처음 보는 듯했다

 

참나무는 온대 낙엽 활엽수림의 대표 수종이고 한국이 원산지인 나무다. "참"자가 이름 앞에 붙으면 좋다는 뜻인데 참나무도 그렇다. 참나무는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를 뭉뚱그려서 부르는 이름이다. 보통 참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는 상수리나무다

 

한국이 원산지라 인공조림을 하지 않은 우리나라 산에는 참나무가 제일 많다. 이름에 "참"자가 붙었으니 용도도 많고 유익해서 친숙한 나무다. 목재는 숯을 굽고, 영지와 표고를 키우며, 건축자재로도 쓴다. 껍질은 코르크다. 상수리로는 묵을 쑨다. 낙엽은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쏘시개로 요긴했다. 무엇하나 버릴 것 없이 좋은 나무가 참나무다

 

유익하고 좋은 탓으로 참나무는 다른 나무에 없는 깊은 상처를 허리춤에 품었다.헐벗고 배고팠던 과거사의 상흔이다.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 가을이 오면 아비는 메를 들고 산에 오른다. 어미와 자식은 자루를 메고 아비를 따른다. 아비가 실하게 자란 상수리나무 앞에 선다. 메를 들어 참나무 허리를 내치면 우박 떨어지듯 상수리가 쏟아져 신비탈을 구른다. 어미와 자식은 빠른 손으로 상수리를 주워담아 자루를 채운다.그렇게 털고 주워서 모은 상수리가 곡간을 채우고 겨울철 양식이 되었다

 

상수리를 절구에 찧어서 가루를 내고 몇날 며칠 쓴맛을 우리고 앙금을 모은다. 앙금을 가마솥에 안쳐서 끓이면 묵이 된다. 묵은 반찬이 되고 참이 되어 배곯던 시절을 함께한 구황식품이었다.

 

메질로 껍질이 뭉개지는 상처를 입었고 그것이 해마다 반복되니 참나무 줄기에는 지워지지 않는 아픈 흔적이 오늘 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메를 들고 상수리를 털러 다니지 않는다. 배가 고파서 묵을 먹는 사람도 없다. 재미로 줍는 상수리이고, 별미로 먹는 묵이다

 

어머니 세대가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배가 고파서 상수리를 주우러 다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된 지 오래다. 어머니에게 전설이라도 들었던 우리 세대마저 물러나면 우리나라 아이들도 상수리나무 아래서 상처 구멍이 무슨 구멍인지 궁금해할 날이 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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