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버리고 찾은 것

재정이 할아버지 2019. 7. 7. 14:35



마누라가 안경을 잃어버렸다

방안에 벗어 두고도 찾지 못해서 허둥대는 일이 다반사인 안경이다

그러나 멀쩡히 쓰고 돌아다니다 안경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례적이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시력이 나빠서 쓴 안경이 벗겨지면 시야가 흐려지고 불편해서 모를 리가 없다

근시라 젊어서부터 안경을 썼는데 나이가 들자 원시가 되면서 시력이 회복되어 안경의 필요성이 덜하기는 했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쓰고 있던 안경을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린 줄도 모르니 별나다


이순을 넘기고 나이가 드니 친구들 사이에 별일이 다 생긴다

노래방에서 노래하다 틀니가 튀어 나가기도 하고, 여행 중 호텔 방에 가발을 두고 나왔다가 쓰레기 통을 뒤져서 찾기도 했다

회의를 하는 데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다고 야단을 쳤다가 보청기라는 말에 파안대소한 일도 있다

모두 남의 일이거니 했는데 들판에 나와서 밭일을 하다가 쓰고 있던 안경을 잃어버린 것이다


새벽에 한 시간 넘게 차를 몰아 고향에 왔다

두 필지로 나누어진 호두나무밭에서 예초기로 제초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내가 예초작업을 하는 동안 마누라는 나를 따라다니며 뒷심부름을 했다

시간이 나면 밭 주변에 있는 뽕나무에서 나물로 먹을 뽕잎을 땄다

바쁘게 한나절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마누라가 쓰고 있던 안경이 없어졌다고 하니 황당할 뿐이다


마누라 짐작으로는 뽕잎을 따면서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뽕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잎을 따기 때문에 당기고 놓을 때 잔가지가 얼굴을 스치면서 안경이 벗겨진 것 같다는 말이다

책을 읽을 때 필요해서 내가 사준 비싼 다촛점 안경이라 꼭 찾아야 한다는 마누라의 강박감이 커 보였다

뽕잎을 담았던 자루를 뒤집어서 헤쳐보고 오늘 다닌 길을 되 짚으며 한참을 찾았지만, 허사다

넓은 들판 풀섶에 떨어진 조그만 안경을 찾는다는 것은 덤불에서 바늘 찾기다

예초기 작업에 지쳤는데 말도 안 되는 안경 찾기가 겹치니 짜증이 나서 마누라에게 안경을 포기하라고 했다 

미련을 못 버려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마누라에게 더 좋은 것으로 사주마고 달래서 집으로 왔다


마누라는 무슨 일이든 집중해서 몰입하는 탓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한다

음식을 하다가도 TV에 홀리면 옆에서 냄비에 음식이 다 타도 모른다

뽕잎 따는 재미로 따라왔으니 뽕잎에 미쳐서 안경이 벗겨져도 모를 정도로 신나게 뽕잎을 딴 것이다


집에 와서도 아끼던 안경을 잃어버린 마누라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안경을 맞추러 가자고 해도 완강히 도리질이다

보름마다 고향에 가니 그때 가서 한번 더 찾아보자고 벼를 뿐이다


보름이 지나서 다시 호두나무밭에 갔다

호두나무밭에 가보니 잃어버린 안경 찾기는 절망적이었다

봄 가뭄이 심했었는데 보름 동안 비가 몇 차례 온 탓에 풀이 부쩍 자라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것이다

기왕에 왔으니 한번 더 찾아보자고 내가 앞장서서 안경 찾기에 나섰다

지난번에 같이 일했던 밭과 뽕잎을 딴 뽕나무 밑을 작대기로 헤쳐가며 샅샅이 뒤졌다

두시간이 넘게 안경을 찾겠다고 들판을 헤맸지만, 안경은 찾지 못하고 둘 다 지쳐 버렸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 마누라도 안경 찾기를 포기했다

내가 더 좋은 안경을 사 주겠다는 약속도 다시 했다


잃어버린 안경 찾기를 포기하자 마누라도 기분이 좋아 졌다

마침 뽕나무에는 오디가 맛있게 익었다

마누라는 오디를 따고, 나는 호두나무 전지를 하러 밭으로 내려 갔다


호두나무를 전지하고 있는데 마누라 비명이 들렸다

안경을 찾았다는 것이다

너무 기뻐서 마누라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비명 처럼 들렸다


들에는 화장실이 없다

눈길을 피해서 풀섶이나 으슥한 곳에 숨어 해우를 하는 것이 들판의 법칙이다

마누라가 오디를 따다가 소피를 하려고 뽕나무 밑으로 갔다고 한다

뽕나무에는 잘 익은 오디가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소피를 보면서 어느 가지 오디를 딸까 살펴보고 있는데 뽕잎 속에서 햇빛에 무엇이 반짝 스쳤다고 한다

볼 일을 마치고 무엇이 반짝였는지 다가서 가 보니 작은 가지 뽕잎 사이에 마누라 안경이 걸어 둔 듯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안경을 찾으려고 둘이서 몇 번이나 살펴봤던 뽕나무다 

애타게 찾을 때는 숨어버리고, 찾기를 포기하니 보인다

잃어버린 것도 황당하지만, 찾은 것은 더 어처구니없는 마누라 안경이다 

'생원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수리나무의 상흔  (0) 2019.07.18
쓰레기봉투는 쓰레기봉투  (0) 2019.07.12
나 어떡해  (0) 2019.06.28
그놈이 그놈2  (0) 2019.06.23
늦기 전에  (0) 2019.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