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그놈이 그놈2

재정이 할아버지 2019. 6. 23. 16:33

자정이 넘었다

한숨을 자고, 목이 말라 일어났는데 마누라는 여전히 TV 앞을 지키고 있다

내가 옆에 가도 모를 만큼 TV 화면에 푹 빠져있다


마누라가 넋을 놓고 보고 있는 TV 프로는 미혼 남녀들이 단체 미팅으로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고, 연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이야기다

나도 가끔 그 프로를 마누라 옆에서 곁눈질로 보기는 했다

건성으로 보니 재미는 없다

신세대들의 가치관이나 여가문화에 대해서 새로움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다


마누라는 젊은이가 입는 옷, 먹는 음식, 데이트 코스,  둘이 나누는 말 한마디에도 내 일처럼 반응한다

연애도 시대를 따른다

우리 세대는 능력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남자가 주도해서 움직이고 여자는 다소곳이 따라 주는 것을 미덕이라 여겼다

남자는 여자에게 네 인생을 책임진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여자는 남자를 따르겠다는 믿음을 주고받는 과정이었다

신세대 연애는 다르다

여자는 자기를 무한 만족시킬 남자를 찾는다

여자에게 희생하고 헌신할 각오가 없으면 단박에 퇴짜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징표는 선물이고, 특별한 날에는 기발한 이벤트로 감동을 줘야 한다

주인공은 여자이고 남자는 조연이다

주인공이 마음먹으면 조연은 아무 때나 바꿀 수 있다


마누라가 보고 있는 프로에서 집단 미팅이 끝나면 상대를 고르는 차례가 온다

여자들은 고민한다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돈도 많고, 노래도 잘하는 완벽한 남자가 이상형이라 선택이 쉽지  않다

남자의 선택은  비교적 단순하다

예쁘고 착하면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상대를 고르는 기 싸움에 들어 가면 마누라도 같이 고민한다

찜해 둔 남자도 있다

남자 친구 고르는 재미가 이 프로에 푹 빠진 이유다 

찜한 남자가 어떤 여자와 짝이 되어서 얼마나 달콤한 연애를 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마누라의 관심사다


이순을 넘긴 여자가 지금 젊은이들처럼 자유분방한 연애를 했을 리 없고, 기억에 남는 추억도 변변치 않을 터다

가부장제가 완고했던 시기라 여자는 참고 살아서 더욱 그렇다

사랑의 기쁨도 알지 못하고  나이가 차서 밀려 결혼한 세대들이다

소싯적으로 돌아가 다시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젊은이들 상큼한 연애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이라도 하는 것이리라


젊은이들의 달달한 연애질 구경에 푹 빠진 마누라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기왕에 반려가 되어 평생을 함께 살 것이었다면 요즘 젊은이들처럼 좋은 선물도 사주고, 멋진 이벤트를 베풀어주었으면 지금도 떳떳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내가 마누라에게 우리 둘이 지금 저 프로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면 나를 찜 할 거냐고 넌짓이 물어봤다

마누라는 풍선 터지듯 헛웃음을 치며 손사래를 친다

다 그놈이 그놈이란다

평생을 살았어도 속을 알 수 없고, 속은 것만 같은 것이 남자인데 누가 누구를 찜하냐는 것이다

차라리 심지 뽑기를 해서 걸리는 놈을 팔자려니 길들여 사는 것이 편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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