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가짜 같은 진짜 뉴스

재정이 할아버지 2019. 5. 20. 21:06

어린이집에서 아기들에게 장난감 상자를 풀어 놓으면 남자아이들은 물총이나 자동차를 집어 들고, 여자아이들은 소꿉놀이 주방기구나 아기인형을 잡는다고 한다. 누가 가르치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별로 비슷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TV 리모컨을 잡으면 남자 어른들은 뉴스나 운동경기를 보고, 여자 어른들은 드라마나 가요 프로를 본다.

 

수술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며칠간 병원에 입원했었다.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수술 상처가 잘 아물었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검사를 받기 위함이다.

 

병원 생활은 따분하다. 다인실 병실은 환자들의 신음, 주사 맞고 약제 처리하는 소리, 의료기기들의 기계음으로 편히 쉴 공간이 아니다. 병실 밖이라 해도 불편한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병원 밖으로는 나갈 수 없으니 병실 복도를 서성이거나 휴게실에서 TV를 보는 것이 고작이다. 휴게실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다. 문병 온 사람이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낯익은 환자들끼리 모여서 잡담을 나누다 보니 항상 소란하다.

 

TV는 병동 휴게실에 1대가 있다. 무료해서 TV라도 보려고 휴게실에 가면 남자 어른들만 있거나, 여자 어른들만 있거나 둘 중 하나다. 리모컨을 잡은 사람이 남자면 뉴스를 보고 주로 남자들만 본다. 리모컨을 잡은 사람이 여자이면 드라마를 보고 대부분 여자만 있다. 젊은 사람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무엇을 보는지 알 수도 없고, 시끄러운 휴게소에는 나오지도 않아 노인들 차지다. 몸이 아픈 환자들이라 뉴스든 드라마든 조용히 앉아서 덤덤하게 TV를 본다. 무심하게 TV를 지켜보다가 그나마 흥미가 없으면 조용히 나간다. 내 취향에 맞는 채널로 바꾸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유별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뉴스를 보려고 꼭두새벽부터 휴게실에 죽치고 앉아서 리모컨을 놓지 않는 남자 어르신이 있었다. 어르신은 뉴스를 보면서 동시에 해설도 한다. 누가 있건 말건 사건과 사고에 대해서 시비를 가리고 판결을 해서 살생부까지 만든다. 뉴스 해설가 어르신에 대적해서 리모컨을 노리는 할머니도 있다. 뉴스 해설가 어르신이 간호사에게 불려 가거나, 화장실에 가는 틈을 노려서 리모컨을 잡으려고 항상 TV 앞을 지킨다. 할머니가 리모컨을 잡으면 드라마를 틀고 드라마 작가 된다. 꼬이고 비틀린 드라마 속 가정사를 내 일처럼 비분강개하며 참예하고 훈수하면서 곁가지 드라마를 말로 쓴다.

 

뉴스 해설가와 드라마 작가는 리모컨 주권을 두고 경쟁 관계에 있어서 TV 앞에 함께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 정치는 뉴스 해설가의 전문분야다. 정치 뉴스만 나오면 해박하게 설명하고 신명이 난다. 정치 뉴스 외에는 관심이 없다. 정치 뉴스가 끝나고 방탄소년단 빌보드 차트 1위 뉴스가 나왔다. 옆에서 말 장구를 주고받던 드라마 작가가 연예계 뉴스에 반색하면서 해설가에게 물어본다. 연예계 뉴스는 드라마 작가의 관심 분야다

 

작가 : 방탄소년단 가수 이름이 뭐래요?

해설가 : 몰러유

작가 : 왜 가수는 안 나오고 춤추는 애들만 나와요?

해설가 : 몰러유

작가 : 무슨 노래로 상 탔슈?

해설가 : 몰러유

 

묻는 드라마 작가도, 대답하는 뉴스 해설가도 방탄소년단을 모른다. 뉴스 해설가의 신통치 않은 대답이 답답했는지 옆에 앉아 있던 나에게도 드라마 작가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도 방탄소년단이 누구고,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모른다. 휴게실에 있던 노인들 모두 방탄소년단 가수 이름이나 부른 노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의 음반 시장에서 제일 잘 나가고, 전 세계 음악 팬들을 열광시켰다는 방탄소년단 뉴스를 지금 함께 보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가수라는데 가수가 누구이고, 왜 춤추는 사람만 있고,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젊은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의 간극이 이렇게 큰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 젊은이와 노인의 세상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의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보릿고개를 믿지 않고, 어른은 방탄소년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짜 같은 진짜 뉴스, 진짜 같은 가짜 뉴스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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