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코다리

재정이 할아버지 2019. 5. 12. 21:12



코다리가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 걸렸다

마을에 시장이 없다 보니 마누라는 장날에 유성장을 본다

유성장에서 마을 가게에서는 살 수 없는 먹거리를 사 온다

코다리 같은 생선도 사서 빨래 건조대에 걸어 두고 먹는다


베란다는 빨래터다

큰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양말이나 걸레를 빠는 빨래터다

바람이 잘 들고 건조대가 있어서 코다리를 걸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시장에서 사 온 물건 대부분은  손질해서 냉장고에 둔다

냉장고에 두지 않고 실온에 보관하는 물건이 있기도 하지만 코다리처럼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 걸어두는 것은 특별한 경우다 

코다리는 반 건조된 명태라 꾸득하게 말려야 맛이 좋다는 이유다

옥상에서 말리면 더 좋은데 파리가 끓고 주방에서 말리면 냄새가 나서 부득이 베란다에 걸어둔다


베란다 빨래터는 내가 담배를 피우는 곳이기도 하다

빨래 건조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목줄에 매달린 코다리가 애처롭게 나를 내려다본다

동병상련, 같은 처지의 연민이다

마누라는 코다리뿐만 아니라 나도 이미 오래전에 코를 꿰어 빨래 건조대에 걸어 놓은 것이다


어부의 그물에 걸리기 전까지 코다리는 넓은 바다를 누비며 거침없이 살았을 터다

직장 일로 전국을 헤집고 다닐 때는 나도 마누라 간섭이나 눈치 없이 호기 있게 살았었다

코다리가 생업의 그물에 걸려 어부의 손에 잡혔다면 나는 세월의 그물에 걸려 은퇴를 하고 마누라 손에 잡혔다

어부는 코다리가 상하지 않도록  내장을 도려내고 바람 부는 곳에 널어놓았다

마누라도 불같은 성깔과 대쪽 같은 나의 자존심을 눅이려고 잔소리로 길들였다

코다리가 마르면서 맛을 내듯 마누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세뇌했다

미끼는 하루 세끼의 따듯한 밥이다


코다리를 옥상에 걸어두면 파리가 달려들고 벌레가 생겨서 먹지 못한다

은퇴하고 칩거하니 마누라는 내게 목줄까지 채웠다

함부로 나대지 못하도록 감시의 눈도 매서워 졌다

여자에게 약하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고스란히 떼인 전과 때문이다

퇴직금을 노리는 꽃뱀과 사업을 하자고 달려드는 사기꾼을 조심하라는 말은 녹음기처럼 달고 살았다

비린내가 난다고 코다리를 베란다에 걸어두듯 담배 냄새가 난다고 옆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속이 보이도록 배를 갈라 열어 놓고 코를 꿰어 매달아 놓은 코다리 신세와 다를게 없다


며칠 지나면 코다리가 밥상에 오르고, 삼식이인 나는 밉상에 오른다  

그래도 내색 없이 맛있는 밥상을 차리는 마누라다

밥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것이 마누라 병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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