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선비라구요?

재정이 할아버지 2018. 6. 3. 23:15

 

 

 

고추가 실하게 잘 자랐다. 마늘, 감자, 토마토까지 올해 농사는 모두 흡족하다. 해동하면서 부터 지금까지 알맞게 주기적으로 비가 내려서 물 한 번 주지 않고 길렀는데도 예년보다 잘 자랐다. 누가 뭐라고 해도 농사의 풍흉은 하느님의 영역이다

 

고추 묘에 방아다리가 단단히 굳어서 곁순을 훑어 주고 있었다. 고추 농사는 방아다리가 생기면 반은 지은 것이다. 이제 부터는 고추가 열리면 익는 대로 따서 말리면 된다.

더위를 피해서 저녁 시간에 주말농장으로 나왔는데 많은 사람이 밭에 물도 주고 풀을 뽑느라고 북새통이다.

고추 곁순을 따고 있는데 이웃 밭 할머니가 친구들과 구경을 왔다. 농사 경험이 없어서 가끔 나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하고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농사를 짓는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친구들에게 "이 양반이 농사도 잘 짓고, 글도 잘 쓰는 선비"라고 소개를 했다

 

우리 말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부를만한 호칭이 마땅치 않다. 직장인이라면 직책에 맞는 호칭을 부르면 되지만, 사업상 만나는 사람은 개나 도나 사장님이라 하고, 3인칭으로 사용할 때는 이 양반이나 저 양반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러함을 알면서도 할머니가 나를 두고 "이 양반이 선비"라고 까지 불러주니 과분해서 쑥스럽다

 

양반이나 선비는 실체가 없는 말이다. 훌륭한 가문의 점잖은 사람이라는 좋은 말일 뿐이다. 양반과 선비가 무엇인지 따지고 들면 골치가 아프지만 쉽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다

농사를 짓던 사람이 글을 읽으면 선비다. 선비가 과거를 봐서 초시라도 합격을 하면 생원이나 진사가 되고 양반이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하지 못하면 선달이다.

예전에는 한자가 어려워 문맹자가 많았고 대다수가 농사일을 했으니 선비와 양반의 구분이 가능했다. 의무교육으로 문맹자가 없고 직업이 다양해서 관직이 아니더라도 존경받는 직업이 많아서 지금은 모두가 선비이고 양반인 셈이니 할머니가 부른 호칭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선비나 양반에게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에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렇게 불러주면 모두 선비이고 양반이다

 

국가나 민족과 같이 사회를 이루는 집단에는 조직을 결집하고 이끄는 전통문화가 있다. 미국의 개척정신, 영국의 신사도,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대표적인데 우리나라의 조직 문화는 선비정신이다

선비는 학식은 있으나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고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세속적인 이익보다 대의와 의리를 소중히 여기므로 불의에는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 선비정신이다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고, 물에 빠져 죽어도 개헤엄을 치지 않으며,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는 속담이 선비정신을 함축했다

 

어질고 지식 있는 선비는 지방의 유지이었다. 재물에 탐을 내지 않으니 대부분 가난했고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이 소나기에 떠내려가도 모를 정도로 글 읽기에 몰두해야 참 선비다. 글을 몰라 무식한 이웃에게 세상 이치를 알려주고 아이들에게는 예의를 가르쳤다. 유림에 모여서 나라 일을 걱정하고 뜻을 모아 상소를 올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글을 읽어 아는 것은 많지만 덕이 부족한 선비는 알량한 지식 자랑과 거만한 처신으로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니 그것이 오늘날의 꼰대다

 

조직의 문화는 오랜 세월 동안 생활 속에 체화된 암묵지로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신대륙을 개척해서 이룬 나라다. 광활한 신대륙을 개척하면서 가혹한 자연환경도 극복해야 했지만 야생동물이나 인디언과 싸우려면 항상 총을 들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개척정신의 상징은 총을 든 카우보이다. 하루가 멀다고 총기 사고가 나는 미국에서 총기규제가 어려운 것은 총이 곧 정의라는 카우보이 문화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나라는 선비 나라답게 교육열이 대단하다.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몰두하는 이유와 목표는 자녀를 선비 사(士)자 직업에 진입시키기 위해서이다

예로부터 직업의 가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해서 선비가 으뜸이었다.지금도 보수가 낮아도 사무직은 좋은 직업이고, 기술자나 서비스업은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다. 돈이 많은 재벌도 관료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다

 

할머니가 선비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선비가 아니다. 조선 시대 선비는 편지, 제사 지방 같은 것을 써주면 곡식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글을 써서 동전 한 닢 얻어낼 구멍이 없다. 백수가 되니 마누라에게 눈칫밥을 먹기 싫으면 고추농사라도 지어야 한다. 날씨가 추우면 전기장판이라도 켤만큼 돈 버는 재주도 있어야 한다. 물에 빠지면 폼 나는 자세로 수영을 해서 나오는 위기대처 능력도 길러야 한다. 오늘의 날씨를 알아봐서 비가 올 것 같으면 우산을 들고 가는 정보력도 있어야 한다

남의 일에 콩 놔라 팥 놔라 따지다가는 꼰대가 된다. 골방에 박혀서 블로그에 마누라 흉보는 글이나 써놓고 누가 공감을 눌러주나 세어 보면서 사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사흘을 굶다가 대추 한 알을 주워 먹고도 트림을 하면서 이를 쑤시는 것이 개헤엄을 안 친다는 선비의 자존심이다

 

나는 그렇게 못 한다

배가 고프면 칡뿌리라도 캐 먹으러 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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