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돈맛

재정이 할아버지 2018. 5. 23. 21:38

음식의 좋은 맛을 진미라고 한다. 세계 3대 진미는 모두 유럽산 음식이다. 프랑스의 송로버섯, 러시아의 철갑상어 알, 프랑스의 거위 간이 그것이다. 세계 3대 진미의 공통점은 귀하고 비싸다는 점이다.

송로버섯과 철갑상어의 알, 거위의 간을 먹어 보기는 커녕 구경도 못했으니 무슨 맛인지 알 수는 없다. 음식을 직접 먹어보지 않고 글로 쓰인 설명으로 맛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영양이나 약리도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과일의 황제 두리안을 먹어보라고 추천을 받는다. 비싸기는 하지만 비싼 만큼 맛이 있다는 것이다. 호기심에 과일가게에 들러 두리안을 처음 보았을 때 지독한 냄새 때문에 먹을 수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과일의 황제이고 진미라는데 안 먹어보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고, 역한 냄새 때문에 못 먹으면 비싼 돈만 날렸다고 후회할 것 같았지만 후회를 할 땐 하더라도 먹어 보자는 심사로 두리안을 샀다

두리안을 쪼개서 과육을 발라내니 쇠고기 기름 덩어리 같다. 입에 넣으니 물컹하고, 느끼하고, 고린내 까지 배어있는 묘한 맛이다. 과일의 아삭한 식감도 없고 상큼함이나 단맛과도 거리가 먼 맛이다. 화생방 훈련하듯 눈을 감고, 코를 막고 진미라는 둘리안을 먹고 나니 종일 입안에서 고린내 트림까지 난다. 먹다가 실수로 옷에 과육이 묻었는지 고약한 냄새 때문에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의 눈총도 받아야 했다. 열대과일의 황제, 진미 과일이라는 추천이 없었다면 기름 덩어리 처럼 생기고 고린내 나는 두리안을 절대로 먹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3대 진미도 막상 먹어보면 그럴 것이다. 향과 식감이 우리 입맛에는 안 맞을 수도 있다. 귀하고 고가이다 보니 맛보다는 가격에 취해서 멋으로 먹는 음식일 수도 있다

 

세계 3대 진미에 대해서는 이론 없이 송로버섯과 철갑상어 알, 거위 간을 꼽지만, 우리나라 3대 진미는 없다. 세계 3대 진미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3대 진미를 임의로 꼽아 보자면 산삼과 송이, 홍어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내 입맛을 기준으로 3대 진미를 꼽으라면 쌀밥과 무김치와 된장이다. 모두 내 땅에서 길러 먹는 공짜 음식이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쌀을 사먹지 않았다. 경기미의 시작이라는 고향 천안에서 농사를 지어 먹는데 밥이 차지고 구수해서 맛이 좋다. 김장 무 중에서 총각무처럼 작은 무만 골라 담는 무김치도 좋아한다. 양념을 거의 하지 않고 담그는 무김치는 일 년을 두고 매일 먹어도 시원하고 개운해서 질리지 않는 맛이 있다. 된장도 집에서 메주를 쑤고 장을 담가서 먹는데 모든 음식에 쓰이고 깔끔한 맛이 있다

 

몇 해 전 겨울, 손자 재정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따발총처럼 기침을 하고 콧물이 폭포수처럼 흐른다. 목이 붓고 가래가 끼어 물도 삼키지 못하고 먹어도 금방 토한다. 우리 집 3대 진미인 밥과 무김치와 된장국을 잘 먹었는데 모두 마다한다. 아내가 걱정되어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 먹여봐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동안 안 먹던 감자튀김을 잘 받아먹었다. 오래전에 사다 놓은 감자가 몇 개 있었는데 그것을 저며서 튀겨주니 날름날름 잘 받아먹는다는 것이다

 

감자가 금값이었다. 여름의 폭염과 겨울의 혹한이 겹쳐 감자 농사가 흉년이라 그렇다는데 감자 한 알 값이 2천 원으로 전복 두 개 값이 넘고, 돼지고기보다 비싸다고 한다. 아내가 재정이를 먹이려고 한 개에 2천 원이나 하는 감자를 사러 나가면서 쌀 때는 안 먹던 감자를 비싸니까 달게 먹는 재정이가 얄밉다고 머리통에 알밤을 한 대 날렸다.

 

단맛, 신맛, 쓴맛, 짠맛의 미각에 매운맛의 촉감을 더 해서 느끼는 것이 음식의 맛이다. 우아하게 품위를 지키며 사는 귀족들은 세계 3대 진미를, 소박한 서민은 자기 집 3대 진미를 먹고 산다. 단맛, 신맛, 쓴맛, 짠맛의 미각에 귀족은 돈맛을 더해서 즐기고, 서민은 인생의 매운맛을 더해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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