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재정이 할아버지 2018. 5. 29. 05:42




전화기를 정리하다 보니 지난봄에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하룻밤 비바람에 하얀 철쭉 무리 아래에 피다만 꽃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져 있다

화려하게 피는 듯 싶었는데 허망하게 져버린 꽃잎을 보니 화무십일홍이라는 탄식이 절로 난다




철쭉 옆에 서 있는  왕벚나무 역시 화려한 꽃구름을 품고 있지만  그 아래에는 열흘을 못 넘긴 꽃잎이 켜켜이 쌓여있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지만

지금 그 자리에 가보니 꽃은 흔적도 없고 나뭇잎만 무성하다



우리 어머니 십팔번 노래는 노들강변과 노랫가락 차차차이다

독창을 할 때는 노들강변, 케이팝 스타처럼 단체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를 때는 노랫가락 차차차다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백수를 훨씬 넘겼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이니 60년대의 일이다

어머니 나이로는 사십 대 중반, 그쯤이었다

지금은 사십 대 노처녀도 흔하지만, 어머니는 그 나이에 며느리와 손자까지 둔 집안의 어른이었다

당시에는 수명이 짧아 환갑노인은 마을에서도 꼽을 정도로 귀했으니 사십 대 부터는 중늙은이다

젊은 나이에는 일제의 수탈로 배를 곯고,  해방이 되자마자 전쟁을 겪으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불행한 세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와 이념의 차이로 주변국으로부터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며 사는 불행한 민족이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일보다는 오늘에 충실하고, 오늘을 축복으로 여기며 즐겁게 지낸다는 것이 이스라엘을 다녀온 여행자들의 말이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난 우리나라 60년대가 그랬던 것 같다

배불리 먹고 평화로운 삶을 즐기자는 문화가 팽배했었다

큰 마당이 있는 우리 집 대청에는 늘 장구가 놓여 있었다

저녁이 되면 어머니 친구들이 수시로 마실을 왔다

농사일로 고단했을 터인데도 자주 모였다

처음에는 농사 이야기, 동네 이야기로 시시덕거리다가 노들강변 노래가 시작된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아무나 장구채를 잡고 장구를 두드리면 모두 일어나 신명나게 덩실덩실 춤을 춘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느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매번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장구 소리에 맞추어 어깨춤을 추며 노랫가락 차차차를 부르는 아낙들의 모습은 우리 마을만의 풍경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잔칫집이나 유원지에서는 흔하게 보는 일상이었다


어린 나이에 하도 들어서 뜻도 모른 채 흥얼거리던 노래가 노랫가락 차차차이다

화무십일홍은 한참 후에 그 뜻을 알고 이해할 수 있었다

꽃이 고와도 열흘을 못가고, 권력은 십년을 못간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노랫가락 차차차를 들을 수 없었다

그때보다 더 잘 먹고 민주화가 되어 자유를 누리고 사는데도 노세, 노세, 젊어서 놀자는 노래는 종적을 감추었다

당시에도 가사의 내용이 너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의 대상이기는 했다

유행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배고픔과 전쟁의 공포로 젊은 날을 보낸 어머니들이 그 한풀이로 부른 노래가 노랫가락 차차차인것 같다


비바람에 떨어진 꽃잎에서 눈으로는 화무십일홍이 보이는데 마음속으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격변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을 권불십년이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범죄단체도 아니고 나라의 권력 핵심에 있던 사람들이 굴비 두릅 꿰듯 엮여서 단체로 징역살이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는 지겹다

십 일의 짧은 기간은 꽃이 종자를 잉태하는 시간이다

비바람에 떨어졌든, 천수를 다하고 지는 꽃잎이든 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새 생명이 시작된다

새 생명으로 여무는 씨앗에는 원한이나 복수를 품지 말고 역사의 교훈을 품고 자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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