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꿀 먹은 벙어리

재정이 할아버지 2018. 7. 2. 07:12

나이 탓인지 오랜만에 만난 옛 직장 동료 모임이 시작부터 꿀 먹은 벙어리다

팔팔한 청춘에 만나서 미래를 논하고, 정의를 부르짖던 기개는 간데없고 후줄근한 서로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만 볼 뿐이다

잘 먹던 고기도 마다하고 피와 같다고 탐하던 술잔도 천덕꾸러기다

이곳저곳 안 아픈 사람이 없어서 가리는 음식도 많다

술김에 얼굴이 불콰해져서 상사나 정치인을 안주 삼아 말로 씹어대야 활기가 도는데 모두 입을 다물고 있으니 썰렁하다

좌장인 선배가 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손자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충고한 이후 더욱 그렇다

여자들 같으면 반찬으로 나온 겉절이를 먹으며 짜네, 싱겁네, 뭐가 빠졌네 하면서 몇 시간을 떠들어도 지치지 않는데 남자들은 기껏 만나서 손 한번 잡고 앉으면 빨리 회식이 끝나서 어둡기 전에 집에 갈 걱정만 하고 있다  

재미없고 지루한 모임이 끝나자 좌장 선배가 요즘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마무리까지 했다


꿀 먹은 벙어리는 꿀을 훔쳐 먹다 들킨 사람이 봉변을 피하려고 벙어리 흉내를 낸다는 뜻이다

생각을 드러내지도 말고, 나서지도 말고, 모자라게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침묵은 금이라는 서양 속담에 수긍하는 경우가 많다

마누라나 자식이 하는 일이 못마땅해도 모자란 듯, 못 본 듯 꾹꾹 눌러 참고 지나면 그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였음을 후에 알게 된다

내가 우물거리며 먹고 있는 것이 꿀인지 개떡인지 남이 모르게 살라는 뜻이 꿀 먹은 벙어리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심하게 울고 보채서 난감한 경우가 종종 있다

안아주고 얼래봐도 소용이 없으면 별수 없이 아기를 등에 업는다

우는 아기를 업어주면 신통하게 울음을 그친다

우는 아기를 업고 토닥이면 울음을 그치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라고 한다

아기는 누워 있거나 앉아 있으면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로 여기고 배고픔이나 불편함을 울음으로 적극 표현한다고 한다

아기를 등에 업고 걸어갈 때는 위험을 피하기 위한 이동으로 인식해서 불안을 느끼고 자신을 숨기려고 울음을 그친다는 것이다

오뉴월 달밤에는 개구리가 요란스레 운다

개구리 소리가 요란한 논길에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면 어느 순간 개구리가 울음을 멈춘다

위험하다고 느끼면 침묵하는 것이 동물의 습성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상사가 화를 내면 사무실이 얼어붙고, 부부싸움을 하면 아이들이 골방에 엎드려 숨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즈음은 노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말수가 적어진 것 같다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의 실천이라면 좋은 일이지만, 개구리가 인기척에 놀라서 울음을 그치듯 무엇에 놀라서 침묵을 한다면 그것은 낭패다  

밤중에 물 마시러 일어났을 때 어두운 주방에서 마누라가 무엇을 먹다가 놀라서 감추었다면 몰래 꿀을 먹은 것인지, 배가 고파서 마른 빵을 먹었는지 말을 안 하면 궁금하다

아들이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여자 친구가 생겨서 바람을 피우는 것인지, 내 차를 끌고 나가서 사고를 낸 것인지 말을 안 해서 모르고 있다면 큰일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정치인을 구워 먹고, 재벌을 지져 먹어야 하고, 아기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야 하고, 논에서는 개구리가 시끄럽게 우는 것이 정상이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있다면 무엇인가 숨기는 것이 있고 불안한 것이다

꿀 먹은 벙어리는 돌림병이 아니다

개구리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면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고, 무엇을 보았기에 불안해서 울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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