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일기

黎明의 시간에

재정이 할아버지 2020. 10. 24. 19:53

새벽 6시. 집을 나선다. 여느 때 같으면 잠자리에 뭉개고 누워있거나 TV로 뉴스를 보고 있을 시간이다.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봉급쟁이의 생활습관은 대부분 그렇다. 은퇴 후에도 생활습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명의 시간에 이렇게 집을 나서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일이다

 

길을 나서니 소싯적에 읽었던 스님의 글귀가 또 나를 붙잡는다. 어디를 이렇게 급히 가시느냐고 스님이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스님에게 대답했다.

밭에 일하러 갑니다. 조카 결혼식에 갑니다. 손자 보러 아들 집에 갑니다. 공부하러 학교에 갑니다...... 모두 그렇고 그런 연유로 바쁘게 길을 가야 하는 사정이다.

스님은 하늘을 바라보며 헛헛하게 웃었다. 바보들, 결국은 죽으러 가는 길인데 무엇이 이렇게 바쁜가?

 

會者定離라 했으니 만남도 이별의 시작이라는 관념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젊은 나에게는 너무 염세적이라 반감이 컸다. 그 반감으로 나의 사생관은 죽는 날까지는 사는 것이 되었다

 

윤달이 들어 반 박자씩 계절이 늦은 해라고는 하지만 10월 중순으로 접어드니 아침, 저녁으로는 바람이 차다. 간절기에는 외출할 때마다 옷 챙겨 입기가 쉽지 않다. 현관문을 열고 먼저 나간 아내가 얇은 옷이 걱정되어 춥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괜찮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따라나섰다. 결혼해서 40여 년을 함께 살아보니 이제 아내와는 말이 필요 없다. 대하소설은 몇 장을 안 읽어도 줄거리가 바뀌지 않듯 눈빛과 손짓만 봐도 상대의 속마음을 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건강검진은 의무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일반인은 건강관리공단에서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한다. 해마다 하는 건강검진이지만 과정은 괴롭고 결과표를 받아보는 것은 무섭다

피를 뽑고, 대소변을 받고, 내시경 검사를 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 모두 온통 공포다. 나를 위해서 아픈 곳을 미리 찾아내어 치료하자는 국책사업이니 피할 수도 없다. 전에는 과정만 괴로웠지 결과는 두렵지 않았다. 결과에서 특별함도 주의사항도 없었기 때문이다. 은퇴를 하고 이순을 넘기자 건강검진 결과표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혈액 성분과 사진판독에서 이상이 생겨 재검사를 받기도 했다

 

건강보험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병원 문턱이 높고 약값도 비싸서 몸이 아파도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고샅길을 같이 쓰는 젊은이가 갑자기 죽으면 급살이니 염병이라고 했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몸이 아프면 나무뿌리를 캐다가 달여 마시는 민간요법이 치료수단이고 그마저 신통치 않으면 무당을 불러 굿거리를 했다. 그랬던 나라가 발전하여 복지국가의 백성이 되었다는 자부심은 국가가 내 건강을 지켜 주고 병원의 첨단시설을 싼값에 이용할 때 느끼게 된다. 그래서 건강검진이 무섭고 두렵기는 하지만 피하지는 않는다.

 

올해에는 건강검진 병원에서 급하게 호출을 했다. 가슴 CT 사진에 폐암으로 의심되는 결절이 있으니 빨리 상급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으라는 것이다

속된 말로 암 진단은 사형선고다. 의술이 발전하고 신약을 개발해도 암은 여전히 불치병이다. 걸어서 병원에 들어갔다가 기어서 나오는 것이 부지기수인 난치병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불치병인 암 진단이 나오면 본인은 혼절하고 가족은 울고불고 난리 치는 이유다

해마다 하는 건강검진이고 해마다 각오하고 결과표를 받아보는 학습효과인지 폐암 예고에도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사회가 변한 만큼 발전하는 의학 수준에 맞추어 암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찾아오는 질병의 하나라는 암묵지가 형성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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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의학 영상으로만 이상소견이 있을 뿐이지 내가 암 환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더욱더 그렇다. 유행가 가사처럼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온 것이라면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하라고 하고 난감한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죽음 앞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헛것이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죽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은 오롯이 내 몸인데 정작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훌륭한 의사를 찾아가서 최적의 시술을 받는 것 외에는 하늘의 뜻이다.

이러한 결과는 모두 나의 잘못이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담배를 피웠다. 먼지와 냄새가 많이 나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직업을 가졌었다. 형제가 둘이나 폐암으로 죽은 가족력이 있다. 건강검진 문진에서 드러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나는 오래전부터 폐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폐암 고위험군임을 알면서도 예방을 위해서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서울의 상급 병원은 몸이 아픈 환자 입장에서는 최후의 선택지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최악의 상황이 크게 똬리를 틀었다. 하늘은 무너졌고 살아날 작은 구멍이 검진 병원에서 빨리 가라고 일러준 상급병원이다. 지방에도 상급병원은 있지만 용케도 서울의 상급병원이 먼저 예약이 되어서 그 작은 구멍의 빛을 따라가는 길이다.

벌써 석 달째 보름 주기로 온갖 검사를 하고 있다. 검진 병원에서는 절망적인 중증으로 봤지만, 서울의 상급병원은 수술치료가 가능한 초기 암으로 예상했다. 작아서 조직검사도 할 수 없는 완두콩만 한 결절이 오른쪽 폐의 하엽에 붙어 있다고 했다. 흉강경 수술로 그 결절을 떼어내고 검사를 해봐야 무슨 병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암이라고 해도 조기발견으로 완치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죽는 날까지는 사는 것이라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이제는 삶과 죽음의 진검승부를 겨눌 순간이 왔다. 암 병동에서 말기 암으로 진단되어 치료마저 포기하고 돌아서는 환자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고행이다.

 

새벽에 집을 나서 병원을 간다. 오늘도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긴다. 피를 뽑고, 사진을 찍고, 수술대에도 누울 것이다. 의사 손이 내 생명줄이다.

생명줄을 잡고 병원 가는 길모퉁이에서 스님이 불쑥 나타났다. 어디든 따라다니며 무시로 나를 붙잡는 스님이다. 동티처럼 달라붙은 스님의 책이 아픈 나를 더 아프게 한다

이른 새벽에 어디를 이렇게 바쁘게 가느냐고 스님이 또 묻는다

 

黎明의 시간에 餘命을 구하러 갑니다. 열 번도 넘게 한 같은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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