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왔는데 집에 올때 라면을 사오라는 전화였다
무슨 라면을 사느냐고 물었더니 아무거나 알아서 사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마트에 가보니 라면 종류가 수십가지다
집에서 가끔 라면을 먹기는 하지만 나는 그 라면이 무슨 라면인지 알지 못한다
마누라가 끓여 주는 라면을 먹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알아서 사오라는 라면을 고르기가 쉽지를 않다
나는 알아서 하라는 말과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감춘채 나에게 판단을 미루고 그 결과를 책임지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말은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하는 수단이다
명료한 표현과 정확한 의미를 전하는 것이 말을 잘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신입사원, 신병, 신부와 같이 신자가 붙은 시절에 고생한 이야기는 평생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다양하고 많다
그런데 고생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말에서 비롯 된다
경험도 없고, 낯 설고 서툰 신입사원에게 알아서 해보라는 말 처럼 두렵고 힘든 일은 없다
명문대학을 나오고 취업을 위해서 다양한 경험과 공부를 했지만 서류복사 심부름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가 되어 좌절하는 이유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다
나는 신입사원 멘토를 여러번 했다
멘토의 역할은 신입사원에게 기업문화와 사람을 익히고 해야 할 일의 성격과 처리방법을 알려주어 조직의 일원으로 정착 시키기 위한 배려이다
신입사원이 어떤 멘토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재로 성장하기도 하고 좌절해서 낙오의 길로 가기도 한다
나는 신입사원을 배정 받으면 작은 일 하나를 시키면서도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신입사원에게 내가 무엇을 하라고 말했는지 설명을 해보라고 한다
처음에는 거짓말 처럼 내가 한 이야기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알려주면 이해도가 높아져서 실수 없이 그 일을 해낸다
그런 훈련을 일년 가까이 하다보면 어느새 그 신입사원은 아주 훌륭한 동료가 되어 있고 나를 도와주는 후배로 성장한다
나는 라면을 사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갔다
마누라가 왜 라면을 안 사왔느냐고 묻기에 깜빡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마누라는 벌써 치매증상 까지 보인다며 성질을 낸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내방으로 들어 갔다
나이가 들면서 말을 잘하는것 보다 안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는 것을 때때로 깨닫는다
아무거나 알아서 사오라는 말이 싫어서 안 사왔다고 내가 말을 했으면 마누라하고 한바탕 싸음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 말을 참고 하고 싶은 말을 숨기니 세상이 편하다
이것이 내가 알아서 하는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