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산비둘기 신혼방 염탐(廉探)

재정이 할아버지 2017. 5. 25. 05:50



우리집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다

바람이 불면 거실 창문에 나뭇가지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나무이다  

봄에는 새싹이 움트는 모습을 보여주고 여름에는 커튼 대신 햇볕을 가려주는 고마운 나무다

가을에는 노란 단풍으로 가는 세월을 붙잡고 겨울에는 소복히 내린 눈을 담고 내 곁을 지킨다

은행나무는 잠시 지나치는 새들의 쉼터이기도 해서 가끔 새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에 산비둘기가 둥지를 틀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새려니 했는데 산비둘기의 행동이 이상해서 유심히 지켜보니 둥지를 틀고 알까지 품고 있다

산비둘기는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텃새이지만 바로 눈앞에다 신혼방을 차리고 알을 품고 있으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손님은 없다

우리집 거실의 둥근 대형 유리창은 반사유리창이다

밝은 밖에서는 실내가 보이지 않고  거울처럼 나무를 비치는 유리다

그래서 손에 닿을듯 가까운 거리에서 둥지를 내려다 보고 있어도 산비둘기는 나를 보지 못한다

산비둘기가 둥지를 만들고 알을 품고 새끼를 키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행운이다

지금 산비둘기는 알을 품고 있으면서 둥지 보수작업이 한창이다

숫놈은 나뭇가지와 깃털을 물어 나르고 암컷은 알을 품으며 숫컷이 물고 온 재료로 둥지를 다듬는 일에 바쁘다

내가 지척에서 모든것을 들여다 보고 있음에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산비둘기는 제집을 찾아가는 길을 숨기기 위해서 조심하고 경계하고 신중하다

산비둘기는 둥지에 들어가기 전에 전기줄에 앉아서 주변을 살핀 후 둥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지로 날아와 또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차츰 차츰 둥지 가까이로 가는데 보는 사람이나 동물이 있는지 계속 살피고 또 살핀다

매번 같은 자리에서 똑 같은 행동을 한다

영화에서 탐정이 범인을 추적하듯 비밀스럽게 들고 나는 산비둘기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난다

마누라는 소파에 엎드려 산비둘기 둥지를 지켜보는 재미에 빠져 만사를 제쳤다

안타깝게도 나뭇잎에 가려 둥지안은 볼 수가 없지만 신혼부부 방을 훔쳐보는 관음의 희열을 느낀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옛날에는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으로 어렴풋이 알던 일들을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눈앞에서 본듯이 알 수가 있다

거리나 건물 곳곳에 매섭게 부릅뜨고 있는 CCTV를 피할 수가 없고 인공위성에서도 세상 곳곳을 현미경처럼 들여다 보고있다

손자가 보고 싶으면 화상전화를 걸어서 손자가 밥먹는 모습도 볼 수가 있다

마누라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면 전화기로 위치추적을 해서 밥을 먹고 있는 식당까지 알아낸다

네비게이션을 켜면 처음가는 산속 오두막집도 찾는다

사람이 편하자고 만든 문명의 이기들이 이제는 족쇄가 되어 버렸다

내가슴에 깊이 묻어둔 마음만 빼고 비밀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산비둘기는 아무도 모르게 신방을 차리고 알을 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산비둘기가 어디에서 누구와 살고 있고, 오늘은 무엇을 먹었는지 모두 내려다 보고 있다 

내가 마누라와 아옹다옹 살고 있는 모습도 누군가가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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