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등산화

재정이 할아버지 2017. 10. 23. 06:20


내 등산화는 특별하다

평범한 등산화이지만 TV에 출연한 등산화이다

직장에서 퇴직을 했다

조직에 소속되어 맡은 일을 하고 매달 월급을 받던 봉급쟁이 생활이 끝난 것이다

맡아서 책임질 일도 없고 월급도 없는 자연인 삶의 시작이다

새로운 삶의 종잣돈으로 퇴직금이라는 거금이 내손에 쥐어졌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다

그렇지만 월급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앞서서 돈은 통장에 묻어두고 쓸 엄두도 못냈다

그렇게 몇달을 보내며 마음을 삭이고 나니 하고 싶은 일의 순서가 잡혔다

마누라와 내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일이었다

대전은 우리나라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전국 어디든지 두세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런 지역적 특성 때문에 산으로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모객 관광버스가 매일 수십대가  출발을 한다

요금도 비싸지 않고 운전을 하지 않으니 피곤하지도 않아서 퇴직자들이 주로 이용한다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시장에 나가서 제일 먼저 산것이 등산화다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며 폼나게 구경하려면 발이 편해야 하니 조금 비싼 등산화를 샀다  

신발은 팔자를 이르는 물건이다

신발은 나만의 물건이다 

아무리 곤궁해도 남의 신발은 얻어 신지 않는다

신발을 바꾸어 신었다고 하면 직업을 바꾸거나 하던 일을 접은 것이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하면 여자가 팔자를 고친다는 의미로 이혼을  뜻한다

신발은 발에 맞고 두짝이 같아야 한다

그래서 신발을 사는 것을  결혼과 비유하기도 한다

등산화, 등산복, 배낭까지 새것으로 장만해서 폼나게 처음 나들이를 한곳은 집 근처에 있는 계족산이었다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어서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걷는 곳이라 마누라와 오붓하게 가을 단풍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입에서 젊은 여자가 따라 붙었다

등산화가 좋다는 말 부터 시작해서 등산을 자주 다니는지, 어떻게 가는지를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다

마누라와 나는 따라오는 여자가 묻는 대로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여자는 MBC "시사매거진 2580" PD였다

인터뷰를 위한 사전탐색이 끝나자 명함을 내밀며 협조를 부탁했다

주제는 "등산화가 너무 비싸다"이고 우리 부부 등산화가 취재 대상 등산화라는 것도 말해주었다

동의를 해서 한시간 정도 같이 산을 오르며 이야기도 하고 특정 자세도 보여주고 그렇게 취재를 했다

취재내용은 1주일 뒤에 방송되었다

벌써 7년전 일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의미가 담긴 등산화 이벤트로는 좋은 추억이었다

등산화를 사고 등산복도 샀지만 여행은 처음 계획처럼 많이 다니지는 못했다

내가 바로 취업이 되어서 지금 까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달에 한두번 정도 버스를 타고 주말에 여행을 간다

마누라는 여행을 다녀오면 대형지도 여행지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리고 날짜를 적어 놓는다

내 등산화의 족적이 팔도강산에 찍히고 나면 지도에도 빨간 동그라미가 앵두처럼 주렁주렁 달릴 것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아무곳에나 가지는 않는다

서산대사의 가르침대로 나의 발자국이 아들과 손자의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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