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접시를 깨자

재정이 할아버지 2017. 10. 26. 06:00

 

 

 

마누라가 하나 남은 접시 마저 깨뜨렸다. 오래전에 직장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접시인데 마음에 안들어서 쓸때마다 투덜거리던 접시이다. 쎄트로된 접시라 마음에 안들어도 무던히 참으며 그동안 잘 썼다

 

우리집은 고물창고다. 우선 사람부터 고물이다. 청소기도 오래되었고 김치냉장고도 오래되었다. 내구년수가 지나서 기계가 처음처럼 원활하지 못하다. 아직 고장이 나지 않아서 쓰고는 있지만 조금이라도 고장이 나면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요즈음 기계는 고장도 안난다

 

고물은 장점도 있다. 수동식이고 기계식이어서 간단한 부품의 고장은 눈썰미있는 수리공에게 맡기면 싼값에 고쳐서 쓸수가 있다. 문제는 부품이 없어서 수리자체가 안되는 것인데 유사부품을 어거지로 끼워서 맞으면 쓰고 맞지 않으면 도리없이 버려야 한다

 

청소기는 손자가 망가트렸다. 손자는 우리집에 오면 숨겨논 청소기를 용케도 찾아내어 온방을 끌고 다닌다. 굴리고 메어쳐서 성한 곳이 없으니 청소기를 돌리면 깨진 쇳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청소기도 김치냉장고도 직장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것이다

 

나의 직장생활은 안정적이었지만 깊게 들어가보면 복잡하고 다난했다. 같은 일을 하는 한 사무실에서 공무원과 공사사원과 주식회사사원으로 신분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세번의 사표를 쓰고, 세번의 퇴직금을 받고, 세번의 채용과정을 거쳤다. 회사의 체재가 바뀌면 창업과정에서 조직과 인력이 반으로 줄어들고 사무실 집기까지 바뀐다. 직장을 떠나는 동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남은 직원들의 스트레스도 상상을 뛰어 넘는다. 그런 창업과정의 스트레스 보상이 창업기념품이다. 당시에 유행하는 가전제품을 상품권으로 받았다

 

창업과정에서 받은 상품권을 마누라에게 가져다 주면서 회사에서 주는 상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직장일을 일체 말하지 않는 탓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해서 월급을 받아오는지 조차 모르는 마누라이니 거짓말은 식은 죽 먹기다. 마누라가 사고 싶다고 하던 물건을 골랐고 마누라에게는 남편 내조를 잘하는 부인에게만 회사에서 특별히 주는 상이라고 했다. 마누라가 큰 선물을 상으로 받았다고 하니 좋아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한턱을 내느라고 청소기 값, 김치냉장고 값이 더 들어갔지만 사람 사는 맛으로 싫지는 않은 추억이다

 

은행이나 백화점에서도 기념일이나 행사때 옷이나 주방제품을 주어서 받아만 놓고 안쓰는 물건들이 꽤 많다. 마누라도 나도 이제는 그런 고물들을 버리자고 했다. 기념품이라 못버리고 상으로 받아서 못버린 물건들이 수납공간을 메우고 있으니 요즈음 유행하는 신상품을 써볼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못마땅하던 깨진 접시를 치우는 마누라 표정이 어둡다. 문양이 마음에 안들고 무겁기는 해도 명품이었다는 것이다.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담아내는 정이 들어서 마직막 하나 남은 접시는 오래 쓰고 싶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접시가 깨져야 알 수 있으니 마누라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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