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동안거(冬安居}

재정이 할아버지 2017. 11. 20. 18:12

우리집은 오늘 부터  벚꽃이 필때 까지 동안거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글의 뜻이 좋아서 김장을 담근 다음 날 부터 추운집에서 사는 우리는 서로 동안거라고 위로하면서 산다

동안거는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음력 10월 15일 부터 다음해 1월 15일 까지 불가에서 승려들이 외출을 삼가하고 참선수행에 정진하는 기간을  말한다

출근할 직장도 없고 주말농장 일도 끝났으니 추운 겨울날 밖에 나갈 일은 없다

참선수행은 아니더라도 집안에서 책이나 읽고 뒹굴뒹굴 살게 되는 겨울철은 동안거라는 표현과 딱 어울린다

아파트에서 살때는 관리사무소에서 겨우살이 준비를 알아서 해주니 모르고 살았던 것들이 단독주택에서는 모두 내손으로 해야 한다

김장하는 날자가 잡히면 마누라는 김장준비로 바쁘고 나는 집안 겨우살이 준비로 바쁘다

수도가 얼지않도록 노출된 수도관에 보온재를 입히는 것이 첫번째 일이다

수도계량기와 층마다 있는 분배관을 보온재로 감싸는 것도 한나절 일이다

창문이 많고 커서 창틀에 문풍지도 붙여야 한다

화분에 대파를 심어서 거실 양지쪽에 들인다

김장을 담고 남은 무와 배추는 신문지에 싸고 상자에 담아서 베린다에 둔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겨우살이 준비로 하던 일들을 이제는 내가 한다

골방 윗목에 수수깡으로 통가리를 만들어 고구마를 저장하고, 무와 배추는 채마밭에 묻어두고 먹던 것을 거실 구석에 두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추운 겨울날 가급적 시장을 가지 않고도 집안에서 생활하기 위한 지혜들이다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로 김장담그는 일이 제일 큰 일이다

김장을 담그기 며칠 전 부터 마누라는 군대가는 청년보다 비장하다

아픈 어깨가 탈 없이 견뎌낼 수 있을까, 지난 해에는 짜서 맛이 없었는데 올해는 짜지 않게 잘 담글 수 있을까, 새로산 냉장고가 성능이 너무 좋아숙성에 문제가 있었는데 조절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어 밤잠도 설친다

올해 김장은 절임배추를 사지 않고 내가 주말농장에서 기른 배추를 써야하기 때문에 다듬고 절이고 씻는 일이 부가 되어 더욱 힘이 들것이라고 지레 겁도 먹는다

올해는 무와 배추가 풍년이라 넉넉히 김장을 해서 내년 여름까지 먹을 요량이다

고물 냉장고도 버리지 않아서 냉장고가 3개나 되니 한번 고생할때 많이 해서 두고두고 먹자는 마누라의 계산이다

그래서 내가 농사지은 배추 70포기를 모두 김장에 쓰기로 했다

갯수로는 70포기이지만 시장에서 사는 배추 반만도 못한 크기이고 그나마도 크기가 들쭉날쭉이라 양은 얼마되지 않지만 잔손질이 많이 가는 것은 틀림없다

직장에 다닐때는 언제 김장을 했는지도 모르게 마누라가 알아서 하던 일인데 이제는 나의 조력이 없으면 엄두도 못낸다

마누라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 나는 그  옆에 서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들어주고 옮겨주고 힘쓰는 일 담당이다

내가 배추를 쪼개주면 마누라는 소금치는 간잽이고, 마누라가 물에 헹구어 씻어주면 나는 채곡채곡 쌓아놓는 조적공이고,  마누라가 양념속을 넣고 버무리면 김치통에 담아서 옮기는 것이 내몫이다

하루는 절이고, 하루는 버무려 담고 그렇게 어렵고 지루한 김장 담그기가 끝났다

마누라는 마지막 김치통을 채워서 내게 밀어주고는 고무장갑을 벗어 팽개치고 사우나를 간다며 나가버렸다

기술자의 행패같아서 괘씸하기는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조수인 나는 별 수 없이 김장담던 그릇을 설거지하고 정리를 했다

방과 거실도 구석구석 여러번 쓸고 닦았다

그리고 거실 아랫목에 전기장판을 깔고 난로도 켜놓고 마누라를 기다렸다

시골같으면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고 화롯불을 담아 들여오지만 도시에서는 전기장판과 난로가 대안이다

사우나를 다녀온 마누라는 틀림없이 내일까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잠만 잘 것이다

겨우살이 준비가 모두 끝났으니 김장 피로가 풀려도 전기장판에 엉덩이를 지지며 겨우내 누워서 김장만 파먹고 살자고 할 것이다

기나긴 겨울은 이제 시작이다

싸우지 않고 아프지 않는 것은 내가 해야할 일이고, 춥지 않고 눈이 내려 쌓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 도와줄  일이다

그것이 우리집 동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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