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눈보라

재정이 할아버지 2017. 12. 6. 06:05



빛바랜 사진이다

뒤에 보이는 산은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있는 대둔산이다

하얗게 눈에 덮혀있다



대둔산에 오르기전 함께 간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야영을 하면서 새를 잡아서 구워먹는다고 공기총까지 들고 갔다

그시절 등산은 그랬다


어쩌면 이 사진이 내 삶의 마지막 사진일 수도 있었다

나라를 비탄에 빠트린 영종도 낚시배 사고처럼 대형 인명사고가 날때면 한번씩 꺼내서 보는 사진이다

안전사고는 예고가 없다

아무리 대비를 한다고 해도 갑작스레 몰아치는 위험에서 목숨을 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나도 겨울철 등산에서 조난을 당해 죽음과 맞선 경험이 있다

그때는 고생했다, 힘들었다는 정도로 지나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긴박한 순간이었는지 몸서리가 쳐진다 

1972년도 대학생 시절 겨울이다

논산에 사는 친구로 부터 대둔산 등산을 가자는 연락이 왔다

대둔산은 계룡산과 함께 대전근교의 명산이라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자주 갔던 익숙한 산이다

학교 산악회에서 산악대장을 하는 친구, 대둔산 아랫동네에 사는 논산의 친구, 그렇게 셋이서 겨울등산을 하자는 것이다

혈기가 탱천하고 겁이 없던 시기라 영하의 한겨울에도 야영을 하기로 했다

오후에 셋이 만나서 논산 쪽 산 중턱에서 야영을 했다

그때 까지는 날씨가 좋았다

한달에도 몇번씩 산에서 야영을 즐기던 우리는 추위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간밤에 싸락눈이 내려서 군용텐트가 얼어붙고 산정상에 흰눈이 덮여있는 것을 환호하며 반겼다

그때 찍은 사진이 위에 있는 사진이다 

대둔산이라면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다는 산악대장, 동네 뒷산이라 공기총으로 토끼잡고 새잡으러 길이 닳토록 돌아다녔다는 친구가 남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 겨울 등산을 하기로 했던 터라 오히려 눈이 반가웠다

남들이 가보지 못한 길, 그것도 눈길로 모험등산을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짐을 챙겨서 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9시경 이었다

조붓한 나뭇꾼 길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한시간 쯤 지났다

아침부터 간간히 내리던 싸락눈이 함박눈이 되고 눈보라가 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서 지척을 분간할 수도 없었지만 우리는 눈경치에 혼이 뺏겨 이름답다고 탄성을 지르며 계속 산을 올라갔다

그리고 멀리서 부터 정상이라고 생각한 목표를 향해서 갔다

정상까지만 가면 거기서 부터는 아무리 눈이 쌓여도 길을 잘 안다는 산악대장을 믿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올라간 봉우리는 정상이 아니었다

눈발은 더욱 거세져서 앞이 보이지 않고 무픞까지 눈이 쌓였다

아침부터 눈을 맞고 걸었으니 옷도 다 젖었다

눈보라에 가려서 정상은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동쪽인지 서쪽인지 방향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옷이 젖어서 잠시만 서있어도 금방 얼어 붙을듯 추위가 엄습해 왔다

되돌아 갈 퇴로 역시 분별이 안되니 오직 정상을 찾는것 만이 살길이 되어 버렸다

간간이 눈발이 약해질때 나타는 높은 봉우리를 향해서 계속 걸었다

걷지 않으면 얼어 죽을 상황이다

길도 없고, 길이 있어도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눈쌓인 곳은 크레바스와 같아서 잘못 밟으면 낭떠러지로 추락이다

나뭇가지를 붙잡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골짜기는 위험해서 능선을 따라 걸었다

능선의 칼날처럼 뾰죽한 바위 아래는 까마득한 벼랑이다

한사람이라도 미끄러지거나 다치면 큰일이라 로프로 서로 몸을 묶었다  

그렇게 해서 정상이라고 믿고 어렵게 올라간 두번째 봉우리도 정상은 아니었다

두번째 봉우리마저 정상이 아니라고 확인하는 순간부터 조난이라는 생각, 죽음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두렵게 했다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구조연락을 할 수 있는 시절도 아니다

우리가 산에 온 것을 아는 사람도 없다

이제 부터는 산에서 고립되어 내려가지 못하면 얼어 죽을 것이고 개구리 소년처럼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정상 찾기를 포기하고 무조건 아래로 내려 가기로 결정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세시를 넘기고 있었다

체력이 탈진한 나는 배낭을 벗어두고 가볍게 최대한 빨리 내려가자고 했지만 산악대장은 길을 찾지 못해서 야영을 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서 무겁고 힘이 들더라도 장비배낭을 메고 가자고 했다

내려가는 길을 찾기는 올라가는 길 찾기 보다 더 어렵다

눈덮힌 소나무의 아름다움도, 싸리나무에 얼어붙은 상고대도 보이지 않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깊고 넓은 골짜기만 보였다

절박한 위기에서 우리를 살린것은 비상용 군대 전화선이었다

눈밭을 한참 헤메고 있을때 산악대장이 능선을 따라 설치된 비상용 군대 통신선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 전선을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전선이 깔린 곳이 길이라는 산악대장의 판단이 옳았다

한시간 가량 전선을 따라 내려가니 도로가 나왔다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만든 도로였다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지만 트럭이 다니는 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얼마 안되어 숲속에서 불빛이 보이고 불빛이 비치는 오두막집을 찾았다

늦은밤이었지만 늙은 노부부는 우리 셋을 받아들이고 먹이고 재워주었다

그 추위와 공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따듯한 방에서 몸을 녹이자 설사와 구토로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 노인에게 물어보니 우리는 정상과는 반대쪽인 논산 양촌에서 올라와 금산 진산 쪽으로 내려온것 이었다

노인은 우리셋이 밤늦게 집에 들어섰을때 총까지 메고 있어서 무장공비로 알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고 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에 산에 간 것을 어른들이 알면 야단맞을 걱정에 셋은 비밀을 약속했다

그 비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낚싯배에서 순간적으로 닥친 위험과 생과 사를 가른 운명은 남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눈이 오는 날이면 대둔산에서 하루 종일 퍼붓던 깊은 계곡의 눈보라가 아련히 떠오른다

겨울이 긴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라도 이러한 눈보라에 관한 추억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눈보라는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기억에 오래 남는 소설이다

눈이 오는 날 인연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눈보라를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깊은 산속에서 눈보라를 만났지만 죽음 직전에 전화선을 잡고 살아 내려왔듯, 눈보라 때문에 절망의 나락에 빠진 여인이 인연의 끈을 잡고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자료에서 퍼온 글]

‘눈보라’는 푸시킨의 중편소설입니다. 대강의 줄거리는 한 농가의 아름다운 딸 마샤가 블라즈미르라는 한 남자를 사랑했는데 부모가 반대하여 몰래 인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쳐 블라즈미르는 교회에 가지 못했고 때마침 역시 눈보라 속에 길을 헤매던 부르민이라는 엉뚱한 남자가 교회에 당도했다가 마샤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블라즈미르는 뒤늦게 교회에 갔으나 마샤를 만나지 못하고 전쟁에 끌려나가 나폴레옹 침략군과 싸우다 전사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을에 돌아 온 부르민이라는 군인과 다시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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