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박기사 똥차

재정이 할아버지 2017. 12. 23. 06:32

아침에 창밖을 보니 살짝 눈을 뿌렸다.

길이 미끄럽지는 않지만, 나들이 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날이다

아침에 마누라가 볼일로 외출을 하는데 차로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것을 눈 핑계로 싫다고 했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집 앞에 나갔더니 싸락눈이 덮인 내차 유리창에 "박기사 똥차"라고 써있다

마누라 짓이다

10년이 넘게 타는 차이니 똥차가 맞기는 한데 아직도 멀쩡하고 나한테는 편한 차이다

은퇴를 하고 집에서 손자를 돌보며 지내는 나에게 자동차는 손자 이동수단으로 요긴하다

외출할 일이 별로 없으니 차도 소용이 없었지만 손자가 태어나면서 부터는 아기를 데려오고, 데려가고,  병원에 가려면 자동차는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다

그러다 보니 마누라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박기사가 되었다

기사라는 말의 용도는 참 다양하다

버스나 트럭 운전사도 기사이고, 바둑 두는 사람도 기사이고, 말 탄 군인도 기사이고, 조금이라도 기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모두 기사라고 부른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기술직 공무원 관직명이 기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반 행정직은 서기. 주사, 사무관, 이사관 등의 관직명이 있지만, 기계, 화공, 농업 등의 기술직 공무원은 기원, 기사, 기좌, 기감, 기정이 관직명이다

나도 기술직 공무원이라 직장에서 박기사로 불렸고,  집에 걸려오는 전화도 박기사를 찾고,  길에서 만나는 아는 사람들도 박기사 안녕하시냐는 인사가 공식 호칭이었다

그때는 마누라도 나를 박기사로 불렀다

직장이 공사로 전환되면서 관직명을 사용하지 않아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손자를 차에 태우고 다니면서 부터 박기사라고 다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자 뒤에 붙는 호칭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불리는 당사자에게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직장동료 중에는 기사라는 호칭이 싫어서 행정직으로 전직을 한 사람도 있었다

사농공상이라는 뿌리 깊은 선비사상 때문인지 서기, 주사는 공무원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기사라는 호칭은 듣기에 따라 비호감인 경우가 많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행정직과 기술직의 알력은 대단하다

기관장이 행정직이면 행정직이 득세를 하고 기술직이 기관장이 되면 기술직이 득세를 한다

행정직은 전통적인 업무인 인사권과 예산권을 쥐고 있고, 기술직은 사업의 집행을 다룬다

우리 집에서 마누라는 재산권과 식탁 메뉴권을 가지고 나를 압박하고 나는 집 안팎의 청소와 운전을 담당한다

마누라가 뿔나면 돈도 안주고 김치만 먹인다

내가 뿔나면 집안이 더러워지고 외출이 어렵다

차를 안 태워준다고 내 차에 마누라가 똥차라고 써놨다

이제부터 마누라가 내 차에 타면 마누라는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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