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잠 못 드는 밤

재정이 할아버지 2018. 9. 3. 06:14

잠 못 드는 밤이 한 달을 넘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한 백수에게는 유일하게 차고 넘치는 것이 시간인데 남는 시간에 공짜로 자는 잠마저 마음껏 못 잔 것이 억울하다

인체시간의 변화로 새벽잠을 못 잔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변화된 생활습관에 적응하면서 수면시간을 유지하려고 초저녁에 일찍 잠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초저녁에 잠을 자려고 아무리 피곤해도 낮잠은 자지 않는다


새벽에 눈을 뜨면 주말농장에 나가서 농사일을 한다

채소는 내 손으로 길러 먹는다

아침을 먹고 나면 운동 삼아 집안 청소를 한다

거실과 여러 개의 방을 쓸고 닦는 것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노동이다

오후가 되면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손자의 충직한 종이 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자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든다

주는 대로 먹고, 보이는 대로 몸을 움직여 일하고, 시간이 되면 단잠을 자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저명한 의사가 칼럼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것이 보약이라고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은 각각 다른 신체의 기능 같지만 정교한 톱니처럼 하나로 이루어진 유기체라는 것이다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탈이나면 먹지 못하고, 잠을 설치고, 배탈이 동시에 나타난다

한달이 넘게 잠 못 드는 밤을 보냈으니 입맛이 없고, 먹은 것이 없으니 변비가 생겨 몽유병 환자처럼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 


내가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는 날씨 때문이다

밤새워 근무하는 경비직이라 잠이 부족하다면 억울하지는 않다

무슨 주식을 사서 대박을 터트릴까 궁리하느라 날 새는 줄 몰랐다면 명분이라도 있다

바람이 나서 과부댁 담장을 넘느라고 그랬다면 후회는 없다

지옥불 같은 폭염이 엄습한 잔인한 여름의 열대야 때문에 잠을 못 자니 난감하기만 하다


여름은 더운 것이니 며칠의 열대야쯤은 참고 견딜 만 하다

해만 뜨면 기온이 30도를 넘고 평생 처음으로  40도가 넘는 더위도 경험했다

밤중에 창문을 열어도 뜨거운 바람이 분다

한낮에 달구어진 열기는 밤에도 식지 않아서 집안 전체가 찜질방이다

에어컨을 켜고 자다 보면 추워서 깨고, 추워서 끄고 자면 더워서 깬다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에는 거리에 사람도 없고 차도 없이 적막만 흐른다

열대지방 사람들이 점심에 낮잠을 자는 시간이 있듯 모두 집안에 틀어박혀 더위와 싸우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에는 소나기라도 내려서 더위를 식혀주는 법인데 올해 여름에는 소나기조차 없었다

소일삼아 심어 놓은 주말농장 채소들이 말라 죽어도 우물까지 말라붙어 줄 물이 없다

오죽하면 태풍이라도 와서 비가 내려주기를 기다리는 지경까지 왔다


태풍이 왔다

태풍은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주는 기상재해다

피해를 보고 고통을 받을 때는 받더라도 극심한 폭염과 잔혹한 가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태풍이 몰고 오는 비바람이기 때문에 태풍을 반겼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가 들썩였다

기다리던 태풍이 오는 날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을 못 잤다


몇 년 만에 올라오는 태풍이 우리나라 중심부를 관통한다는 예보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태풍 경로는 새벽에 내가 사는 충청도 내륙을 지나게 되어있었다

충청도는 풍수해 재난이 거의 없는 지역이라 태풍이 내륙을 관통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올라오는 태풍은 중형급으로 위력이 대단해서 먼저 영향권에 든 제주도는 비바람에 휩쓸려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태풍전야가 되자 심상치 않은 비바람이 쇳소리를 내며 가로수 나뭇가지를 사정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TV에서는 태풍에 대비하라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을 닫는 것 밖에는 속수무책이다

걱정만 쌓여서 뉴스를 들으며 비몽사몽 잠만 못 잤다   

          

태풍이 지나간다는 새벽이 왔다

창밖은 바람도 없이 고요하다

기다리던 비도 찔끔 언 발에 오줌 누기로 그쳤다

머피의 법칙인지 기다리면 안 오고 바라면 안 되는가 보다

태풍이 이름값도 못 하고 변죽만 울리다가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비바람의 세력이 역대급 태풍이라는 엄포는 공갈이 되고 말았다


공갈 태풍도 태풍은 태풍인지라 밤 기온은 시원해졌다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뇌성벽력에 놀라서 잠이 깼다

태풍이 지나가도 오지 않던 비가 태풍이 지나간 뒤에 기습적으로 폭우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밝으니 우리 마을 저지대가 침수되어 난리다

주말농장 30평 밭도 몽땅 침수되어 엊그제 심은 김장 배추와 무가 흔적도 없다


비가 오는 날은  빗소리를 들으며 잠자기 좋은 날이다

비가 적당히 오면 세상이 청소한 듯 깨끗해지고 청량감이 넘친다

기후가 변해서 그런지 이제는 비가 와도 미친듯 사납게 퍼붓는다

배수시설을 개량해도 삽시간에 퍼붓는 폭우를 감당하기에 벅차서 넘치고 잠긴다

그런 비가 사나흘 쉬지 않고 내리니 이제는 빗소리도 무섭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고 하더니 긴 더위와 가뭄을 견디던 채소들이 뿌리째 뽑혀나갔다

소일거리로 가꾸던 채마밭이 수몰된 것도 마음이 아픈데 생계 수단이 농사인 농부들은 황폐해진 밭을 바라보며 살아갈 걱정에 잠을 못 잘 것이다


이제는 여름도 끝물이다

올해 여름은 열대야로 잠을 못 자고, 공갈 태풍에 속고,  물난리로 집과 밭이 초토화되었노라는 추억만 남길 것이다

변화하는 날씨를 따라 삶의 방식도 바뀐다

날씨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고 순응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먹고 살기 힘들면 고통을 참느라고 잠 못 자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좋은 집에서 살려고 새 집을 샀는데 전에 살던 집만도 못하면 분해서 잠을 못 잔다

변화는 소리 없이 조용히 이루어져야지 단칼에 자르는 파격은 아픔만 키운다    


올해 여름은 공평했다  

폭염도, 태풍도, 폭우도 온 세상이 다 함께 나누었다

웃어야 하는 것인지 울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고통의 분배만은 공정했다

내가 군대생활을 할 때도 혼자 불려 나가 빳따를 맞으면 억울하고 분한데 단체로 맞으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재수없는 여름은 지나갔다

겨울이나 따듯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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