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에비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2. 8. 07:33

아기가 더럽거나 위험한 물건을 만지려고 하면 엄마는 부지불식  "에비"라고 말하며 이를 제지한다

아기가 떼를 쓰고 말을 듣지 않을 때에도 "에비 온다"라고 겁박해서 달래기도 한다

예전 어른들이 하던 그대로 더럽고 위험한 것을 에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무심히 쓰는 말도 그냥 생겨난 말은 없다

에비도 뜻을 알면 써서는 안 될 무서운 말이다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은 전리품으로 조선 백성의 코와 귀를 잘라서 일본으로 보냈다

왜군들은 전과를 부풀리기 위해서 병졸과 아녀자, 아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귀와 코를 잘라가는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렇게 조선인 코와 귀를 잘라가는 왜군을 이비야(耳鼻爺)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비야가 에비의 어원이고 귀와 코를 베어 가는 일본 놈이라는 말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왜군들은 물러갔어도 에비는 남아서 우리나라 곳곳에 숨어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서울이 눈감으면 코를 베어 가는 에비가 사는 곳이라고 들으며 자랐다

뻔히 알면서도 피해를 당하는 험난한 세상이라는 뜻이지만 어린 나에게는 에비의 실체가 있다는 말로 들렸다

에비가 무서워서 서울과 먼 대전에 뿌리를 박고 살게 되었고 북쪽인 서울 방향으로는 잠을 잘 때에도 머리를 두지 않았다

에비가 무서워서 서울에 가면 하룻밤도 자지 않고 바로 내려왔다

그 에비가 이제는 서울에서 내려와 시골에도 나타난다    


나는 며칠 전 에비를 만났다

에비는 의사로 변장하고 있었다

에비는 덫을 놓고 사람들이 걸려들기만 기다린다

내가 그  덫에 재수 없게 걸려든 것이다


에비는 덫에 걸린 사람을 그냥 놓아주는 법이 없다

잡은 사람은 도망을 못 가게 자기 집에 가두어 두고 무엇을 떼어갈까 살피며 궁리를  한다

머리부터 발끝 까지, 오장과 육부 훑으며 쓸만한 것을 찾는다


떼어낼 것을 찾으면 나를 꼬드겨 깊은 소굴로 끌고 간다

혹시라도 변심하여 도망칠까 봐 손발을 묶는다

눈을 감아야 잘라 갈 수 있으니 약을 먹여 재웠다

잠에서 깨어보면 감쪽같이 무엇인가를 떼어 간 후다

떼어간 자리는 표시도 나지 않고 조그만 반창고 하나만 붙여놨다


에비를 조심해야 한다

서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어디에도 에비는 숨어있다 

나이든 어른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에비는 나이 많은 어른을 좋아한다

추운 겨울은 에비가 더 많이 나타나는 계절이다 

나는 에비에게 쓸개를 뺏겼다

에비에게 잡혀가면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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