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똥배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2. 20. 07:34

아침에 일어나서 마누라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체중계에 몸무게를 달아 보는 것이다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다

옆에서 체중계에 몸무게를 다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기는 하지만 마누라 체중이 얼마인지 나는 모른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알려주지도 않는다

마누라 체중은 나에게도 무척 중요하다

마누라 체중이 정해 놓은 한계치 아래에 있으면 맛있는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

한계치 보다 올라가면 한동안 점심은 걸러야 하고 기름진 반찬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누라가 체중에 목을 매는 이유는 똥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 나는 체중계에 올라가서 체중이 불어있으면 기분이 좋다

50대 때가 그랬다

하루가 다르게 체중이 불어나고 불어난 만큼 똥배도 나왔다

돌아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이었다

직장에서는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고, 월급 봉투도 똥배만큼 두툼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안색이 좋다고 하고 풍채가 당당하다고도 했다

전에 입던 옷이 작아서 철마다 새 옷으로 사 입어야 했지만 그것도 즐겁던 시절이었다


똥배는 통통하게 불어나온 아랫배를 이르는 속된 말이다

속되지 않게 표현할 고상한 말도 마땅히 없다

의학지식이 넘쳐나고 건강한 삶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똥배는 모든 사람의 적이 되었다

만병의 근원이고 자기관리를 게을리한 표식이라 부끄러움의 대상이된 것이다

똥배는 많이 먹어서 생기는 비만 현상이다

먹을 것이 부족한 절대 빈민국에는 비만이 없다

오히려 비만이 부의 상징이고 아름다움의 기준이다

70년대 까지 우리나라도 그랬다

보릿고개라는 배고픔을 겪던 시절에 똥배가 나온 사람을 똥배 사장이라고 불렀고 실제로 돈 많은 부자였다

똥배를 인격이라고도 했고 불룩한 배를 내밀고 뒷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돌 전 유아를 대상으로 우량아 선발대회도 있어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기도 자랑거리였다


고급식당 고가의 식사는 다양한 요리가 맛 보기처럼 조금씩 나온다

언제 어디서나 신선하고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는 부자들은 조금씩, 골고루, 깊은 맛을 느끼며 식사를 한다

가뿐한 몸을 유지하려고 많이 먹지도 않는다

배고픈 서민들의 식사는 푸짐해야 한다

고기만 보면, 몸에 좋다면, 싸다면 폭식을 한다

서구에서 서민 비만이 많은 이유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값싼 간편식 식품 소비가 늘어나면서 서민 비만이 늘어나는 추세다

똥배가 이제는 부의 상징은 아니다  


어쩌다 외출을 하려면 옷을 골라 입기가 쉽지 않다

체중이 50대 이전으로 돌아가면서 커서 맞는 옷이 없다

똥배가 들어가니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바지가 헐렁하다

옷태도 안 나고 흘러내릴 것 같아 불편하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삼시 세끼를 잘 먹는데도 시나브로 체중이 줄어 청년 시절의 마른 체형으로 돌아갔다

마누라처럼 체중 관리를 하지도 않았다

음식의 깊은 맛을 느끼며 소식을 하지도 않았다

마누라가 차려주는 대로 더도 덜도 아니고 알맞게 먹었다

조금은 똥배가 나올 만큼 살이 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적당히 똥배가 나와야 보기도 좋고 건강해 보인다

덕장에 매달린 황태처럼 뱃가죽이 말라붙으니 바지를 입을 때마다 마누라가 걱정이다

나는 똥배가 안 나와서 걱정, 마누라는 나올까 봐 걱정

우리 집의 아침은 걱정으로 시작한다

'생원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謹賀新年  (0) 2018.12.31
미꾸라지의 탄식  (0) 2018.12.26
나도 공주다  (0) 2018.12.12
에비  (0) 2018.12.08
탄동천 단풍길 걷기  (0) 2018.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