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뿌리농사

재정이 할아버지 2016. 12. 20. 11:46

[뿌리 농사]

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그렇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겪는 통상의 사슬에서 풀려나자 전매청 발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영월지청 수납과로 초임되었다.

먼 발치로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담배농사 경작지도 부서에 푸짐하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부임하던 첫날, 계장은 담배경작 참고 도서를 한아름 안기며 한달 동안 이것만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다. 학교 교과서에서도 특용작물 과목에 열쪽 정도로 간략히 소개 되었을 뿐인 담배 단일 작물에 초미시적인 생리, 병리 이론에 근거한 경작기술서들이었다.

봄이 오고, 담배 경작인을 찾아다니는 경작지도 출장이 시작되었다. 나의 직장생활 초기는 시험준비하듯 암기한 얇팍한 지식과 귀동냥, 눈치 동냥으로 땜질한 이론이, 산지 경작인들의 현실 벽 앞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뭉개져서 좌절감을 느끼는 시절이었다.

그 당시 공무원 풍토로야 밀어 붙여서 안될것이 없는 세상이었지만, 보수성향이 강한 농민들이 젊고 건방진 공무원 말 한마디에 철저 히 시행하겠노라고 팔뚝을 걷어부칠 줄 알았던 것이 오산이었다. 빈대가 버글거리는 거적바닥이라도 내집이라면 편한것 이어서, 죽어라고 찾아다니며 외쳐대는 새로운 농사기술 지도에 농민들은 귀를 막고 열중쉬어 였다.

신기술이고 나발이고 우선 편한 대로, 손에 익은 농사를 내마음 대로 지어서 소득만 높이면 장땡이라는 현실의 벽을 세우고 경작인은 물러서지 않았으며, 노력과 비용은 좀 들더라도 같은 값이면 고품위 원료를 생산해서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보자는 이론의 벽에서 물러설 수 없는 내 입장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었다.

10여년의 연륜과 체험으로 노련의 때가 뭍기 시작한 지금의 시점 에서 돌이켜보면 그때 산지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고민했던 선무당의 이론과, 도외시 당했던 현실의 갈등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산고의 진통없이는 아기가 태어날 수 없고, 알이 깨어지는 아픔 없이 갈매기가 하늘을 날 수 없다.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전매인들과 용기있는 경작인이 없었다면 폿트육묘, 말칭재배, 벌크건조기와 같은 혁신적 농업기술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농사기술이든 조직사회든 발전한다는 것은 상반된 이해관계가 타협과 절충으로 손익분기점을 찾아내고 그 점선을 따라 이동하는 시간개념이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나 이론도 농민과 회사의 이익이 합치되면 상승발전 되어 나가지만, 그러지 못하면 시행착오의 상처를 남긴채 소멸되어 간다.

전매인이 개발보급한 경작기술 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풋트재배, 말칭재배는 담배 뿐 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농사형태를 바꾸어 놓을 정도의 혁신적인 것이었다.

고추, 오이는 물론 참외, 수박까지 담배경작을 본떠 생산능력과 소득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고 있다.

전매인이 이처럼 타 분야 농업보다 신기술 보급에 앞설 수 있었던 원인은 다른 분야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뿌리에 대한 연구의 개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식물체인 작물은 공통적으로 꽃, 줄기, 뿌리로 되어있다. 꽃과 줄기는 언제나 볼수 있어도 뿌리는 흙에 덮여 볼 수가 없는 특징도 공통적이다. 농민도 볼 수 없는 뿌리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탐스럽게 꽃피고 줄기와 잎이 무성하면 농사가 잘되었다고 기뻐하지만 뿌리가 어떻게 자랐는지 관심도 두지 않는다.

겨울에 양파를 물컵에 담아 길러보면 연약한 잎파리 하나를 올리기 위해 싹트기 훨씬 전부터 수십개의 뿌리를 탐스럽게 내린다.

신기술 담배경작은 거의 모든 주안점이 뿌리 농사다. 목적은 잎이지만 뿌리가 좋으면 잎도 좋아지지 않을 수 없다는 원리를 일찍 깨우쳤기 때문이다. 담배는 묘상에 씨를 뿌릴때 뿌리가 잘 자라도록. 자상에 가식할 때는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훈탄에 심고, 자상에서는 폿트에 심어 기른다. 본밭에 심을 때 뿌리가 공처럼 뭉쳐자란 묘를 심기 위해서이다. 언제나 뿌리가 잘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본포에 아주 심은 후에도 이불 역할을 하는 비닐로 말칭을 해서 뿌리가 왕성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거친 외기로 부터 보호해 준다. 행여 물이 고여 뿌리가 썩을까 배수구를 파고, 심경쇄토를 하며, 높게 북을 준다. 잎을 따기 위한 농사임에도 정작 잎은 바람에 찢기고 찬서리에 얼어 터져도, 뿌리만을 극진히 보호하는 것이 담배농사의 기본이고, 신기술의 근간 이었다.

찢기고 언 잎은 뿌리만 성하면 언제든 새잎이 나온다. 그러나 뿌리가 상하면 잎도 병들고, 뿌리가 자라지 못하면 잎의 생장도 빈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입춘, 부지런한 농부는 정직한 대지에 씨를 뿌리고, 담배잎이 무성할 단오를 기다리며 가슴 설레일 때다.

그러나 이 화창한 새봄에 전매인은 80년 전매사에 종지부를 찍고, 한국담배인삼공사라는 새로운 배로 갈아탈 출항 준비에 바쁘다.

지나간 과거를 새삼 돌이켜 아픔을 더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농부의 마음으로 전매공사라는 조직체를 되짚어 볼 때 건강한 식물은 아니었음이 못내 아쉽다.

꽃과 줄기에 해당되는 관리자의 창사정신과 경영의지는 눈부시게 돋보인 반면 뿌리에 해당되는 하부조직과 하위조직원들은 박토에서 소외의 슬픔을 혼자 삭이며 병들어 가고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직장인이 직업에 만족하고 더욱 열심히 일하고 일맛을 느낄때는 내가 하는 작은 일이 회사와 국가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는 긍지와, 내가 노력한 만큼 보수를 받는다는 보람과, 회사로 부터 더 많은 일을 해달라고 부름받는 승진의 명예를 누릴 때이다.

그러나 이들 소외계층은 적지 않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상대적 격차로 좌절을 하고, 30년 근속자가 5,6급으로 정년퇴직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며, 저것이 내 모습은 행여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화석인사체계에 무기력해진다.

모여 앉으면 불만이 터져 나오고, 불만은 반목을 낳고, 반목은 능율을 저하시키는 악순환은 체제전환과 함께 고쳐져야 한다.

잎과 꽃을 키우기 위해 뿌리를 기르는 지혜, 그러한 원리를 터득하고 농사기술을 발전시킨 전매인의 슬기로 한국담배인삼공사는 모두가 발족을 기뻐하고, 활력이 넘치며, 일할 맛이 나는 직장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기대하여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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