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싸이렌(siren)

재정이 할아버지 2017. 8. 25. 05:45

놀란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를 않는다

베란다에서 멍때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다

갑자기 울려 터지는 폭발음 싸이렌 소리에 기겁을 했다

지척에 있는 동사무소 옥상에서 울리는 싸이렌 소리에 귓청이 터질듯 먹먹하고 유리창이 들썩거린다

실내에서 듣는 싸이렌 소리와 열린 공간에서 듣는 싸이렌 소리는 다르다

고성능 스피커에서 갑자기 내품는 폭발적인 싸이렌 소리에 아기가 놀라서 자지러지게 깨어난 적도 있다

싸이렌이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기원한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새의 모양을 한 마녀의 이름이 싸이렌이다

싸이렌은 바닷가에 살면서 배가 지나가면 남자들을 유혹하는 노래를 부른다

매혹적인 마녀의 노래를 들은 선원들이 혼란에 빠져서 배가 난파를 당한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 싸이렌이다

싸이렌 소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리다

내가 군대를 가기 전에는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 싸이렌이 울렸다

예신과 본신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놀다가도 예신이 울리면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평시에 갑자기 싸이렌이 울리면 지역 어딘가에 불이 났다는 신호다

지금처럼 소방서가 체계화되지 못할 때라 의용소방대원 소집 통보이기도 하면서 인근 주민들에게 대피와 주의를 알리는 신호였다

한밤중에 싸이렌 소리가 들리면 먼저 시계를 보고 밤12시가 아니면 밖에 나가 어디에서 불이 났는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근래에는 민방공훈련을 제외하고는 싸이렌이 울리지 않는다

오늘은 을지훈련과 같이 실시하는 민방공 훈련이라 수없이 예고했지만 지척에서 갑자기 싸이렌이 울리니 놀라는 수 밖에 없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싸이렌 소리 추억이 있다

이웅평이 미그기를 몰고 귀순할 때 울린 공습경보 싸이렌이다

춘천에서 살고 있을 때다

일요일이라 집에서 TV로 천안 북일고등학교가 출전한 고교야구 결승전을 보고있었다

갑자기 야구중계가 중단되며 방송에서 싸이렌이 울렸다

민방위 본부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실제상횡입니다!  지금 현재 경인지역에 적기가 공습중입니다!" 라는 멘트가 숨가쁘게 반복되었다

시내에서도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야구장에서는 경기하던 선수들이 황급히 대기실로 들어가고 관중들이 서둘러 빠져 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마누라는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저 앉는다

춘천에는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도 없다

쌍둥이 아들은 두돌도 안되는 어린것들이라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다

나는 동원예비군이라 유사시에는 몇시간 이내에 소집되어 전방으로 투입된다

놀라서 울고 있는 마누라를 두고 나는 밖으로 뛰쳐 나갔다

춘천은 휴전선과 지척이라 전쟁이 벌어졌다면 대포소리가 날것이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밖에 나와 보니 싸이렌 소리는 나는데 포성은 없다

그런데 아파트 마당에서 보고도 못 믿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춘천은 군인들의 도시다

한집 건너 군인들이 산다

싸이렌이 울리자 아파트 입구마다 바지만 걸치고 군화끈도 못 묶은채 모자와 군복을 든 군인들이 뛰쳐 나오고 있었다

군인들 뒤에는 부인과 아이들이 울면서 따라 나왔다

실제 상황이라면 다시는 못볼 사람과 이별의 장면이 될 수도 있다

삽시간에 뛰어가는 군인들 군화 소리와 울부짓는 아녀자들의 울음소리가 아파트 단지를 덮었다

내가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전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군인이 누구인지 생생하게 보면서 감동을 느낀 장면이다

전쟁의 징후는 없지만 나도 빨리 마누라 피난짐을 싸줄 요량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TV에서는 공습경보가 해제되고 북한의 미그기가 귀순했다는 특보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에도 민방공 훈련이 있는 모양이다

과거 햇볕정책으로 남북경협이 왕성하게 진행될 시기다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여러번 북한을 갔다

2인 1조 팀으로 갔다

한팀이 북한에 있을때 한밤중에 갑자기 싸이렌이 울렸다

호텔의 TV에서는 미군과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긴급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밤중이라 물어볼 안내원도 없고 전화도 되지 않았다

적지인 북한에 있는데 갑자기 전쟁이 났다니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긴박한 형편이 된것이다

두사람은 밤새도록 잠도 못자고 TV에서 보도되는 전쟁뉴스를 지켜 보면서 혹시 둘중에 하나라고 살아서 돌아가면 가족에 남길 유언까지 말해두고 글로 적어 놓았다

아침이 되자 안내원이 왔는데 펑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전쟁이 났다고 밤새도록 뉴스가 나오는데 어떻게 된것이냐고 다급히 물었다

안내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기적으로 하는 훈련이라고 대답을 해서 두사람은 그자리에서 부둥켜 안고 소리내어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같은 훈련도 체제와 방법이 달라서 벌어진 직장동료들의 유명한 일화다

전쟁과 재난을 부르는 마녀의 노래가 싸이렌이다

싸이렌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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