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콩나물 기르기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 1. 08:23

마누라가 베란다에서 조그만 질그릇 시루를 꺼내왔다

우리 집은 해마다 이맘쯤에서  시루에 콩나물을 길러 먹는다

유성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기르는 소립종  쥐눈이콩을 한 됫박 사 온다

쥐눈이콩을 하루쯤 물에 불린다

물에 불린 쥐눈이콩을 베 보자기에 싸서 시루에 안치면 콩나물 기르기 준비는 끝이다

쥐눈이콩을 담은 시루는 빛이 들지 않도록 담요로 덮어서 따듯한 곳에 둔다

콩나물 시루는 오가며 생각이 날 때 마다 물을 뿌려주면 열흘쯤 지나서부터 맛있는 콩나물이 자란다

콩나물 기르기는 생각보다 쉽다

콩과 깨끗한 물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기를 수 있다

시루 대신 플라스틱 통에 콩나물을 키우는 사람도 있다

콩나물 기르기는 어머니가 가르쳐 준 것이다

시장에서 사 먹는 콩나물이 맛이 없다고 시루를 사 와서 콩나물 기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오늘이 지나면 해가 바뀐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한 해를 돌아본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소회도 나이에 따라 많이 다르다

한참 성장하고 공부할 때는 공책에 가득히 새해 결심과 소망을 적었다

대부분 작심삼일로 끝나고 말지만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한 해 동안 내가 한 일도, 내년에 해야 할 일도 마땅히 없다

콩나물을 기르기와 같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관공서의 교육을 콩나물 기르기라고 한다

교육이라고는 해도 학생들과 같이 시험을 치러 점수를 매길 일이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의무적으로 시간만 보내면 그만인 교육이기 때문이다

교육시간 내내 조는 사람이 태반이고 눈은 뜨고 있어도 머릿속에는 집안일 생각에 멍한 얼굴이 대부분이다

콩나물 시루는 물을 주어도 돌아서기 무섭게 아래로 흘러내려서 남는 물이 없는 그릇이다

시루 속의 콩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물맛만 보는데도 시간이 지나면 콩나물로 자란다

교육시간 내내 졸던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면 잠결에 들은 강사의 이야기를 식구들에게 자랑처럼 들려준다

졸다가 가더라도 교육장에 나와서 앉아 있기만 해도 무엇인가 얻어 가는 것이 있다는 것이 일반인 대상 콩나물 기르기 교육이다

콩나물 기르기는 기름진 밭과 호미도 필요 없다

종자를 맺으려고 뜨거운 땡볕 아래서 애써 꽃을 피울 일도 없다

벌레에 먹히고 잡초와 싸울 일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물만 핥아 먹으며 콩나물로 자라서 시루를 채우면 그만이다

시루가 아니고 구멍난  냄비 속에서도 불평 없이 잘 자란다

영양제가 든 비료도 필요 없고 그저 물만 먹는다

나이든 은퇴자의 생활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간단한 삼베에 몸을 감싸고 물이라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자라는 콩나물와 같다

더 바랄 것도, 남길 것도 없다 

빈 시루가 될때까지 깨끗하게 자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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