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서리 맞은 고추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 7. 17:30

마누라가 감기에 걸렸다

추운 집에서 살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데 내가 먼저 감기에 걸렸고 마누라에게 옮은 것이다

나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자에게서 감기가 옮았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자는 감기를 달고 산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 복작대고 사니 돌아가면서 감기를 옮겨 항상 콧물이 나고 기침을 하고 심하면 열까지 난다

태어나서 일 년간 한 달에도 두세 번씩 예방주사를 맞았지만 감기는 별수가 없는 모양이다

유아들이 감기에 잘 걸리는 것은 면역력이 약해서이고 한고비 한고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질병에 저항성을 길러 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번 감기는 지독해서 좀처럼 낫지를 않는다

약을 먹어도, 편히 쉬어도 보름을 넘긴다

마누라도 감기가 심해져서 함께 동네 병원을 갔다

조그만 마을의 병원이니 의사 한 사람이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의원이다

규모는 작지만 종합병원 못지않게 있을 것은 다 있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긴 지 오래되었고 사회가 선진국형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생활주변의 여러 곳에서 실감이 난다

관공서에 가면 공무원들이 관료의 탈을 벗고 영업사원처럼 처신한다

구멍가게라고 불리던 골목의 상점은 편의점으로 변해서 질 좋은 물건을 판다

뒷골목의 식당들도 깨끗하고 위생적이어서 맛 보다는 분위기로 음식을 판다

마을 병원도 마찬가지다

진료를 기다리는 시간에 지루하지 않도록 안마기도 놓고 혈압계도 놓고 커피도 끓여준다

감기가 유행이라 작은 병원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병원 벽면에는 광고와 홍보 포스터가 가지런히 붙어있다

감기 예방법, 당뇨 관리법, 고혈압 관리법 같은 의료 상식이 제일 많다

다음으로는 어린이와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방주사 안내문이다

마누라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벽만 바라보고 서 있다

그 벽에는 신데렐라 주사, 백옥 주사, 비타민 주사, 마늘 주사 같은 미용 주사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지난해 부터 뉴스로만 들었던 미용 주사제를 동네 병원에서도 맞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누라가 미용 주사에 관심이 가는 것 같아서 옆구리를 찌르며 맞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마누라도 신기해서 읽어 볼 뿐 맞고 싶은 것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미용과 건강에 좋다고 하니 하나 맞아 보라고 했더니 희끗희끗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나가 있기는 한데 이렇게 서리를 맞아서 소용이 없다고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주사냐고 반색해서 묻자 마누라는 내 귀에 대고 고추주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슬그머니 병원을 나와 버렸다

서리 맞은 고추는 세상이 좋아져도, 감기를 고쳐도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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