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일기

평창의 추억

재정이 할아버지 2018. 1. 14. 18:34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이 임박했다

동계 올림픽을 알리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개최지 평창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40여 년 전에 공무원 초임지로 강원도 영월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영월에 있었지만 관할구역은 영월, 평창, 정선, 제천, 단양, 원주, 강릉까지로 꽤 넓었다

농가를 찾아다니며 지도하고 조사하는 일이라 사무실 근무보다는 출장을 다니는 날이 많았다

지금도 오지이지만 당시의 영월 일대는 탄광촌이고 교통과 문화적 수준이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다


출장은 버스를 타고 다녔다

버스에서 내려서 마을까지는 십 리고 이십 리고 걸어서 다녔다

마을로 가는 길은 강을 끼고 있거나 큰 고개를 오르내리는 험로가 대부분이었다

물도 맑고 산이 울창해서 무척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러나 항상 아름답고 깨끗한 것만은 아니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기상의 변화가 심했다

걸핏하면 교통이 끊겨 오도 가도 못하고 길에서 소나기에 흠뻑 젖는 곤욕도 감수해야 했다


어느 조직이나 같은 일을 해도 선임은 쉽고 편한 일을, 신입은 어렵고 힘든 일을 맡는다

신입인 나는 정선, 평창, 단양과 같은 오지에서 많이 걸어야 하는 출장을 다녔다


겨울에 평창으로 출장을 갔다

오전에는 멀쩡하던 날씨가 오후에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강원도 지역은 눈이 오면 폭설이다

평창에서 영월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중간의 큰 고개를 넘지 못해서 버스가 운행을 포기했다

고개만 넘으면 영월인데 평창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었고 사무실에 가서 해야 할 일도 있어서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눈은 그쳤지만 눈은 무릎까지 쌓였다

버스를 타고 넘어갈 때도 큰 고개라고 생각은 했지만 걸어서 넘기에 눈길 십 리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고개 중간쯤 갔을 때 약초를 캐는 심마니들을 만나서 함께 고개를 넘었다

한겨울에도 깊은 산을 누비며 약초와 더덕을 캐던 심마니에게는 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고생은 했지만 티끌 없이 하얀 눈 세상 구경은 원 없이 했다

지금도 평창 하면 하얀 눈 세상이 선하게 떠오른다

 

평창의 깊은 산중에는 화전민도 있었다

금지되어서 불을 질러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오래전에 화전으로 일군 밭에 옥수수와 감자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서 내가 찾아간 어느 마을에는 이장도 일 년에 한 번씩 밖에 오지 못하는 마을이라고 했다

이장도 보기 힘든 마을에 공무원이 나타나자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공무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이지 신기하게 나를 바라봤다

점심시간이 되자 청년들이 냇가에 가서 망치로 바위를 두드려 민물고기를 잡아 왔다

개울에는 고기가 많아서 금방 한 바구니를 채워왔고 가마솥에 장작을 지피고 탕을 끓였다

식사는 마을 어른인 상투튼 노인과 내가 방에서 겸상하고 마을 사람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먹었다

손자뻘 되는 손님과 마주 앉은 노인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나에게 먼저 술도 따라 주었다

대접을 받는 것인지 벌을 받는 것인지 불편하고 몹시 어색했던 식사였다


늦여름에 반소매 차림으로 봉평 출장을 갔을 때는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일도 못 보고 도망쳐온 일도 있었다

봉평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에는 허 생원이 금방 나귀를 타고 나올 것처럼 호젓한 시골길이었다

그 길을 일부러 한나절 걸어보기도 했다 


이제는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의 저편에서 가물거리기만 할 뿐 지명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올림픽이 열린다고 연일 평창 뉴스가 나오니 단편적으로 평창에서 살던 생각이 나는 것뿐이다

  

나도 짧은 인생에서 세상 구경은 많이 하고 살았다

영월, 춘천, 옥천, 대전, 남원, 김천, 안동, 청주가 내가 근무했던 곳이다

역마살을 타고나 한자리에 머물지 못한다고 타박하던 마누라는 서울에서 데려왔다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낸다는데 나는 서울 구경조차 제대로 못 하고 오지에서만 살아온 화전민이다

마누라도 화전민이 되어 이제는 친정인 서울에서는 하루도 못산다고 한다

전국의 오지를 떠돌며 살았으니 도시에서는 언제나 촌놈이다   

  

'생원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류독감  (0) 2018.01.16
탁구공  (0) 2018.01.15
왕년에는 나도...  (0) 2018.01.11
100세까지 산다면  (0) 2018.01.08
서리 맞은 고추  (0) 2018.01.07